폭음과 검은 연기에 뒤덮였던 비양도 뱃길
폭음과 검은 연기에 뒤덮였던 비양도 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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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 기행①] 제주 한림항에서 비양도 가는 길

장마 기간 동안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장마 기간에 가뭄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놓였다. 제주는 정말 무더운 여름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동반하고 제주시 한림항 서북쪽에 위치한 비양도를 찾기로 했다.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차례 약속과 식언을 반복하는 동안 방전되어 버린 머리를 충전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에서다.

한림항을 통해 비양도로 가는 길

그간 이 섬을 방문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해 봤지만 한림항과 비양도를 오가는 도항선인 비양호의 운항이 오전 9시와 오후 3시 등 하루 두 차례밖에 이루어지지 않아,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 비양호 한림항과 비양도를 오가는 도항선이다.  ⓒ 장태욱 

그런데 이번에는 이틀 일정으로 가는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광복절 연휴 기간이라 비양호는 하루 여러 차례 증편 운행되고 있었다. 

한림항 내 비양호 대합실에서 우연히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어릴 적에 고향에서 한 동네에 살던 형님 세 분이서 낚싯대를 들고 대합실에서 비양호가 출항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마다 비양도를 방문해 왔는데, 특히 작년에 이 섬에서 큰 물고기를 150마리나 낚았을 때의 그 손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초행길임에도 민박 예약도 하지 않은 채 왔다. 여러 모로 부족한 여행길인데, 든든한 길동무들을 만나서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형님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대기중인 승객들을 승선시키고 아침 9시가 되자 비양호는 1분도 지체 없이 닻줄을 걷어 올렸다. 선수(船首)를 부두에 붙인 채 계류 중이었는데, 잠시 스크류를 후진으로 돌려서 회전할 공간을 확보하더니 방향을 선회해서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한림항 방파제를 빠져나온 비양호는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서북 방향에 있는 비양도를 향해 질주했다.

비양호 승무원은 선장과 기관장 두 명뿐이었는데, 기관장이 이 배의 선주라고 했다.  
  

▲ 비양호 조타실 맑은 날이라 선장은 육안에 의지해서 배를 조선했다. 좁은 조타실 내에 계기는 다 갖추고 있었다.  ⓒ 장태욱 

잠시 양해를 얻어서 배의 브리지를 구경하기로 했다. 사람 한 사람 들어가면 알맞은 공간에 무선 통신기, 레이더 등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맑은 날 매일 다니는 근거리 코스를 운행하는 중이라 선장은 육안에 의지한 채 조타기를 작동했다.

브리지 아래에는 승객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객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운행시간이 고작 10분 남짓한지라 모든 승객들은 갑판에 서 있었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지는 비양도를 보면서 설레는 마음을 추스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 비양호 객실 약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객실이 있었지만 승객들은 모두 갑판에 서 있었다.  ⓒ 장태욱 

비양도 앞바다, 외세가 끊임없이 격돌하던 곳

이 도항선이 유쾌하게 가로지르는 이 바다는 제주 역사에서는 획을 그을 만큼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1270년 진도의 용장성이 함락되기 직전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이 관군의 방어를 뚫고 탐라에 들어올 때 이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 그렇게 들어온 삼별초가 고려 관군을 격파하고 3년간 탐라를 장악했다.

1273년 고려관군과 원의 군대가 삼별초에게 함락당한 탐라를 되찾기 위해 들어올 때 고려장수 고여림은 풀을 가득 실은 배 30척을 이 바다에 띄웠다. 그리고 배에 불을 놓아 삼별초 군대를 유인하였다. 고려군에게 속은 삼별초 주력군이 이 일대로 이동하는 동안 고려군 주력부대는 함덕포로 상륙하여 삼별초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 비양도와 옹포리 사이의 바다 이 바다는 과거 삼별초군과 여몽 연합군이, 고려군과 원의 목호가, 일본군과 미군이 크게 격돌했던 곳이다. 비양호는 이 바다를 지나 비양도로 향했다.  ⓒ 장태욱

탐라가 원의 지배 하에 놓인 지 100년이 지나자 중국에서는 원제국이 수명을 다하고 명나라로 교체되었다. 명과 고려의 조정은 탐라로부터 끊임없이 말을 차출하려 했고, 탐라에 있던 몽고의 목호들은 "어찌 우리 임금이 기른 말을 원수에게 보낼 수 있느냐"며 고려 관리들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를 '목호의 난'이라 한다.

1374년 공민왕은 최영 장군을 제주 행병 도통사로 삼고 ‘목호의 난’을 토벌하도록 명했는데, 최영의 군대가 도착한 곳도 이 바다다. 최영의 부대가 비양도 앞에서 명월포로 상륙하려하자 목호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가까스로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의 부대는 그해 가을 이곳을 출항하여 추자도를 지나 목포에 상륙했다.

고려시대 탐라인들은 삼별초를 시작으로 원과 고려의 지배 하에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그 외세들은 이 바다를 통해 탐라로 들어왔으니 외세에 뱃길을 열어준 이 바다가 야속할 뿐이다.  
  

▲ 비양도 섬이 점점 가까워졌다.  ⓒ 장태욱  

한편 2차대전 말기에 이곳에서는 일본군과 미군 사이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2차대전 말기에 패색이 짙어가던 일제는 최후 일전을 치를 장소로 제주를 택했다. 제주 곳곳에 비행장과 반공호를 만들고 군대를 주둔시켰던 일본군은 한림항에 군인들이 먹을 식량을 쌓아놓았다. 이 일대 일본군 주둔지를 골라서 공습하던 미군은 군량미 야적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림항을 폭격하였다. 굉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은 이후 주민들은 공포에 질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45년 봄이 되자 이 곳에 일본 군함과 보급선이 정박했다. 그 배들에는 군인들과 군수물자들이 가득 실려져 있었다. 그런데 미군 잠수함이 어뢰를 발사하여 이 배들을 침몰시켰다. 일본 군함과 보습선은 침몰했고 일본군 시신 수만 구가 이 일대 바다에 둥둥 떠다녔다. 해방이 되기 전이라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일도 이 지역 주민들의 몫이 되었다. 주민들은 일제가 시키는 대로 배를 타고 다니면서 그 시체를 건져서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데 강제 동원되었다.  

언제 이곳에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냐는 듯 바다는 한없이 푸르고 잔잔했다. 그 잔잔한 바다 물살과 갯내음 나는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비양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다

비양도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산활동기록이 남아있는 섬이다. 비양도의 생성과 관련한 <고려사>의 기록이다.

'목종 10년(1007년)에 탐라에 상서로운 산이 바다에서 솟아났다하므로 태학박사 전공지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탐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날 때는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하고 땅이 진동하여 우레 소리가 무릇 7일 밤낮을 계속하더니, 비로소 구름과 안개가 겉이고 산이 나타났습니다. 초목은 없고 연기가 산 위에 덮여 있어서, 바라보며 마치 석류황과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공지는 몸소 산 밑까지 가서 그 모양을 그려 바쳤다.' 
  

   
▲ 비양리 행정구역상 제주시 한립읍 비양리다. 마을은 북서계절풍을 피해 비양봉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 장태욱

비양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고종 13년이라 하니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이전에 이 섬은 왜구들이 들락거리는 소굴이었다. 

17세기 중반에 제주목사 이원진이 기록한 <탐라지>에는 명월성과 관련하여 "명월포에 있다. 옛날에는 성이 없었는데, 정덕 경오년(1510년)에 장림 목사가 왜선이 정박하는 비양도와 가까운 곳이라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섬도 지키지 못하고 왜구에게 소굴로 내주는 형편이었으니 조선의 국권 상실은 이미 예정된 일이 아니었을까? 
  

▲ 도착 비양도 포구에 비양호가 도착했다.  ⓒ 장태욱  

한림항을 출발한 지 10여 분 만에 비양호는 비양도에 도착했다. 멀리서 봤던 것과 사뭇 다르게 수문장처럼 든든하게 생긴 봉우리 하나가 옹기 종기 모인 작은 집들을 마치 닭이 알을 품듯 아늑히 품고 있었다.  
  

▲ 포구 비양도 포구에 비양호가 도착하면 도착한 승객들과 떠날 사람들과 마중나온 주민들이 모여 포구에 생기가 돈다.  ⓒ 장태욱 

비양도에 발을 내디뎠다. 도착한 승객들보다 마중 나온 주민들이 더 많았다. 섬에 들어오는 사람들과 마중나온 사람들 그리고 섬을 떠나기 위해 포구로 몰려든 사람들이 뒤섞여 포구가 잠시 활기를 띠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편에는 비양도의 주민들과 자연환경에 대해 기사를 작성하겠습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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