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효돈동1] 월라봉, 감귤박물관, 쇠소깍... 볼거리 넘치는 곳

서귀포시는 반경 3km 이내에 인구와 행정이 집중되기 때문에 도심이라고 해봐야 매우 좁은 영역에 제한된다. 이 서귀포시 도심을 벗어나 동쪽으로 향하면, 양 길가에 귤을 재배하는 마을들이 성산포까지 약 40km 정도 이어진다. 그중 첫 번째 나타나는 것이 토평동이고, 그 다음 나타나는 것이 효돈동이다. 서귀포 도심에서 효돈동까지 거리가 불과 4km 남짓하다.

효돈동의 옛 이름은 '쇠둔' 혹은 '쇠돈'이다. '쇠'는 소(牛)를 의미하는 고유어이고, '둔'은 무리를 뜻하는 한자어다. '소를 모아서 기르는 곳'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보인다. 이형상 목사에 의해 그려진 탐라순력도에는 이 마을 지명이 '우둔(牛屯)'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쇠돈'을 한자를 빌려서 표기한 것이다.
  

효돈동 감귤박물관에서 바라본 효돈동의 전경이다.  ⓒ 장태욱

이 마을에 고인돌이 발견되고, '대궐터', '절터'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족보나 구전을 따라가면 1560년경에 문(文)씨가 지금 신효리 마을 중심에서 동북쪽에 정착한 것이 설촌의 시작이라고 한다.

소가 많아 '쇠둔'에서 효행이 넘쳐 '효돈'으로

쇠둔은 17세기에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은 다시 상우둔촌(웃쇠둔)과 하우둔촌(알쇠둔)으로 나눠진 후, 각각 번성하였고, 18세기 중반에는 상우둔촌과 하우둔촌 사이에 중우둔리(중쇠둔)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신우둔리(새쇠둔)이 형성되었다.

쇠둔 혹은 우둔이라 불리던 마을 이름이 18세기 후반부터 '효돈(孝敦)'으로 기록되었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이 효돈으로 변경된 것이 이 마을 출신 선비였던 고명학(高鳴鶴)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고명학(高鳴鶴)은 영조 45년(1769)에 우둔마을에서 출생했다. 집은 가난했으나 글 읽기를 좋아해서 영조1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정에서 우승 벼슬을 주었으나 늙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순조14년에도 주어진 장령 벼슬도 사양했고, 다시 대정현감을 제수하였으니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고명학의 효심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순조22년(1822) 위유어사에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된 조정화는 고명학의 행적을 탐문하고 그의 효심이 소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어사는 그렇게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면 우둔(牛屯)보다는 '효돈(孝敦)'이 좋겠다고 하여 효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효돈이란 '효가 도타운 땅'이란 의미다.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은 웃쇠둔이 상효(上孝)로, 중쇠둔이 중효(中孝)로, 알쇠둔이 하효(下孝)로, 새쇠둔이 신효(新孝)로 변경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중효리와 상효리가 합해져서 상효리로 통합되어 상효, 하효, 신효의 세 마을이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서귀읍이 서귀포시로 승격되면서 상효는 효돈동이 아닌 영천동 소속으로 분리되었다.  

신효마을과 하효마을로 이루어진 효돈동은 한라산 남쪽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서면 마치 산이 효돈동을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겨울에도 거의 눈이 내리지 않을 정도로 포근하여, 도내에서도 단위면적당 귤 수확량이 가장 많고 귤 맛도 으뜸으로 인정받는다.

2008년 초 기준으로 신효마을에는 약 650세대에 1850여 명이 거주하고 있고, 하효마을에는 약 1100세대에 33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두 마을은 초등학교, 중학교는 물론이고, 대부분 기관을 공유하고 있다. 이 두 마을은 동일한 설촌 역사와 생활양식을 공유하며 두 마을이 한 마을인 듯 생활하고 있다.
  

월라봉 신효마을의 상징이다. 과거에는 '달암' 혹은 '다라미'라고 불렀다. 동쪽으로 향한 바위가 달을 쳐다보는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장태욱

월라봉, 달빛이 맨 먼저 찾는 땅

서귀포 시내에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뻗은 1132번 도로를 따라가다 효돈동에 이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월라봉이다. 과거에는 '달암(月岩)'이라고도 했고, '다라미'라고도 했다. 봉우리를 이루는 바위가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마치 달이 뜨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 유사하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달이 뜨면 이 바위를 훤히 비추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라봉은 신효동 산 1번지에 해당한다.

월라봉 인근에는 네 개의 봉우리가 있다. 이중 바위가 동쪽을 향하는 봉우리는 대부분 사유지이기 때문에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개인 과원을 지나야 한다. 이 일대 봉우리들은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고, 그 정상에 오르면 바다가 훤히 내다보인다. 예로부터 좋은 묘터로 알려져 왔는데, 그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제주시 아라동에 이훈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훈장은 부친이 돌아가자 풍수지리에 능한 명인에게 좋은 묘 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의뢰했다. 명인은 월라봉이 그 앞에서는 용이 재주를 부리고, 멀리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어, 문장가가 태어나 자손대대로 번창할 묘 터라 하였다.

이훈장은 비록 일이 어렵게 되긴 하였지만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끝내는 장사를 치렀다.

당시 장례에 동원된 장정 수백 명은 상여를 메고 이훈장 집을 출발하여 한라산 허리를 돌아 월라봉까지 왔고, 그들이 곡을 하면서 월라봉을 올랐으니, 그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이훈장네 가세가 좋고 재력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덕찬돌과 애기업개돌 앞에 보이는 돌이 구덕찬돌이고 뒤에 있는 것이 애기업개돌이다. 감귤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보인다. ⓒ 장태욱

돈을 벌러 나간 아내, 결국 돌이 되고 

월라봉 동쪽에는 서너 평 남짓한 바위굴이 있는데, 이 굴과 관련하여 마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과거 그 굴 안에는 서국이라는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부인과 살고 있었다. 서국의 부인은 얼굴도 예쁘고 요리에도 능해 부잣집에 불려가 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아 생계를 이어간 반면, 서국은 부인 소개로 부잣집에 일을 도와주러 가도 밥을 보통 사람의 서너 배는 먹어치우는 바람에 가는 곳마다 쫓겨나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를 낳은 서국의 부인은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자 아기업개에게 아기를 맡기고 자신이 직접 돈벌러 나섰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관가에 큰 잔치가 며칠 동안 지속되는 바람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여러 날을 관아에 머물게 되었다.

서국의 부인이 돌아오지 않자, 집에는 먹을 음식이 떨어지고 애기는 마냥 울어댔다. 동굴 밖에서 아기를 업은 채 서국의 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기업개는 그만 그 자리에서 아기를 업은 채 돌로 변하고 말았다.

잔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서국의 부인은 아기와 아기업개가 없어지고 빈 애기구덕만 남아있는 것을 보고 빈 구덕을 들고 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아기와 아기업개가 돌로 변한 것을 보고 놀라 자신도 그만 그 자리에서 돌로 변했다.

한참 후 돌아온 서국은 아내와 아기와 아기업개가 모두 돌로 변한 것을 보면서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동굴이 있는 일대를 '땅동산'이라 부른다.

땅동산에는 아기를 업은 형상을 하고 있는 아기업개돌과 빈 구덕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구덕찬돌이 있어서 설화의 현장감을 더해준다.  
  

감귤박물관 효돈동은 감귤이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감귤의 메카에 걸맞게 이곳에 총 사업비 188억 원을 들여 건립한 감귤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 장태욱  

감귤의 메카에 들어선 감귤박물관

땅동산과 월라봉의 북쪽 언덕위에는 최근에 개장한 감귤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감귤박물관이 개관한 것은 2005년 2월 25일이다. 이후에도 2007년도까지 총사업비 188억원을 투자하여 2315㎡ 규모의 감귤박물관을 비롯하여, 2471㎡ 규모의 세계감귤재배유리온실과 1655㎡ 규모의 아열대 식물원등을 갖추고 있다.

또 감귤박물관 인근에는 인공폭포와 감귤체험학습장, 운동시설, 어린이 놀이터 등의 부대시설이 들어서 있어서 주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월라봉 인근에는 봉우리들이 여러 개 있는데, 이 봉우리들의 능선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이 산책로에서 주변 침엽수에서 방출하는 시원한 산소를 마시며 마을은 물론 멀리 바다를 조망하는 것도 이곳을 찾는 이들이 구하는 즐거움이다.
  

소금막포구 과거 이 일대에서 소금을 구었기 때문에 소금막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서쪽으로 보목동과 경계가 맞닿는다.  ⓒ 장태욱

효돈은 바다가 매우 좁은 마을이다. 남원읍 하례리와 보목동 틈에 좁은 바다가 있는데, 이 곳을 '소금막'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이 일대가 소금을 구워 만들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소금막에는 이 바다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는 '소금막 포구'가 있는데, 지금은 '하효항'이라고도 부른다.

소금막 포구의 동쪽에는 효례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쇠소깍'이 있다. '쇠'란 효돈의 옛지명이 유래하고, '소'는 물웅덩이를 뜻하니, '쇠소'란 효돈천 하류의 물웅덩이란 의미다. 그리고 '깍'이란 제주어로 '끝' 혹은 '마지막'을 말하는데, 효돈천 하류가 웅덩이를 형성하여 바다와 만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쇠소깍 '쇠'는 '쇠둔'에서 유래하고, '소'는 연못을 말하며, '깍'이란 '마지막 끝부분'을 의미한다. 효돈 연못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을 말한다. 최근 관광지로 떠오르는 곳이다.  ⓒ 장태욱 

이 물웅덩이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과거에는 이 곳을 '용소(龍沼)'라고 불렀다. 주민들은 여름에 가뭄이 들면 이곳에 모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는데, 그 풍속은 지금까지고 이어지고 있다.

쇠소깍에 서면 계곡 수변의 바위와 나무들이 연못에 비치면 물의 푸른색이 훨씬 진해져 더 신비롭게 다가온다. 최근에 그 신선함과 신비로움에 반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쇠소깍은 지역의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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