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호 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재호 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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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의 뉴욕통신] 아직도 미개한 '관행'이 판을 치는가?
나는 1970년 4월에 광주신병훈련소에 입대하였다.

체 훈련병 복장을 갈아 입기도 전 일이다. 작대기 두개(일등병)를 단 한 녀석이 나에게 다가오더니만 "차렷, 열중쉬엇!", 난 데 없는 호령을 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그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씨익 멎적어 웃었다. 나의 따귀를 떼리려고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잽싸게 피하여 맞지는 않았다. 뭐 이런 사회가 다 있나? 나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졸병으로 입대하였다.

사회에서는 이런 폭력을 휘둘렀다가는 당장 폭력배로 현장범으로 체포되리라...

훈련기간 내내 우리는 내무반에서 훈련조장 하사관들로부터 밤마다 구타를 당했다. 주로 발바닥을 때렸다. 때려도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우리를 때리는 목적은 '상납'할 물질이 필요해서였다.

나는 바둑을 재법 두었기 때문에 바둑덕으로 중대장(대위)과 친분이 생겼다. 종종 훈련도 빼주었고 바둑으로 소일하는 때가 많아졌다. 하사관 중에서도 가장 악질인 놈을 하나 지목하여 고자질해 바쳤다. 우리가 내무생활을 하기가 퍽 힘들다고...

그 하사관은 며칠 없어서 공수훈련에 차출되어 가버렸다. 내 속이 후련했다.

그 중대장 덕으로 나는 모슬포 나의 집 뒤에 있었던 제주경비사령부로 와서 편한 소위 '안방'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다.

군대생활에서는 밥그릇숫자를 유난히도 따졌다. 사회에서의 신분이나 학력은 별 볼일이 없었다. 즉, 계급주의 사회였다. 물론 보안부대와 헌병대라는 특권층이 도사리고 있다. 보안부대가 그중 상위층이다. 보안대 상사는 보통 군인 중령이나 대령과 맞먹었다.

훈련을 받거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일과가 끝나고 내무생활을 하는 순간, '고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에 가장 참아내기 힘든 지옥생활이었다.

상병 정도의 소위 중고참들이 졸병들을 괴롭혔다. 소위 '줄빳다'를 치곤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한 내무반 4~50명 중에서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밉보여도 단체로 당하였다. 그게 군대라는 특수사회란다.

아직도 그 고질 상병의 이름이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김재기'라고 경상도 촌놈이 있었다. 술에 만취되어 밤 늦게 내무반에 들어와서는 잠자는 우리들을 느닷없이 깨우곤 곡갱이 자루로 우릴 구타하곤 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는 그런 독종이었다.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얻어맞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밤은 또 그런 행사를 치룬다고 하길래 내가 맨 앞에 엎드려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빳다를 들고 비틀비틀 거리는 그 놈의 눈치를 보다가 그 빳다를 졸지에 뺏어들고 그 놈 골통을 향해서 야구공 치듯 휘둘렀다.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용케 나의 공격을 피했다.

나는 빳다를 유리창문을 향해서 내던지고 내무반 잠겨진 문을 걷어차고 헌병대로 달렸다. "사람살려라!" 잠자던 헌병들이 펜티바람으로 권총을 차고 나를 따라 왔다. 그 김상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뒷날 나는 그 사실을 중대장과 대대장 그리고 군위관에게 보고했다. 군대생활이 지긋지긋하게 괴로워서 더 이상하고 싶지도 않다고... 당시 군위관은 현재 한마음 병원장 이유근씨였다.

내무반에 들어가서 졸병들 사정을 모두 조사해 보니 엉덩이가 성한 데가 없었다.

뒷날 저녁 취침시간에 옆 친구가 몰래 귀속말로 나에게 "이 일병 참말로 고맙다. 너가 안 그랬더라면 내가 그 녀석을 총살하려고 했지" 그러면서 그가 나에게 몰래 숨겨둔 칼빈총 실탄을 꺼내어 보여줬다. 너무나도 썸짓하였다. 정말로 내가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구나 하면서 나의 반항이 그 녀석의 목숨을 구했구나 싶었다.

그 악독스런 김 상병이 개구리복장(예비역)을 하고 떠난다는 날 특공대가 아무도 몰래 출동하였다. 제주항 부두에 대기중이던 한 특공대원에게 김 상병은 잡히고 말았다...이제까지 우리에게 가했던 폭력을 몽땅 한꺼번에 '반납'시켰다.

그 후 30년이 지나서 모슬포 주둔 해병대의 비참한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서 해병 2기생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다디면서 다시금 뇌리속을 떠돌게 만드는 '사연'들은 모두 "죽도록 빳다를 맞으면서 훈련받았다"는 것이었다. 그 빳다의 목적은 "폭도새끼들을 폭도가 아닌 새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해병대의 잔인성은 어디서부터 대물림했을까...추적해 보니 일제 때 받은 그 폭력습관을 한국군대에 도입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더욱 웃기는 것은 "빳다의 원조'가 거명되어 있었다 (pp.38~45, 해병대 전통과 비화, 정채호 저).

양재호 군의 억울한 죽음을 '제주의 소리'를 통해서 접하면서 나는 수십년전 당했던 나의 고통이 비디오 테이프를 리와인드하듯 돌아갔다. 너무나도 슬펐다. 아직도 미개한 군대가 있구나....그개 '관행'이었구나.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적 폭력이 난무한다.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몰인간적이라 할....그게 무슨 자랑할 만한 '전통'인양.

누가 이 죽음에 책임을 질 것인가?

양재호 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리고 그 부모 형제 자매님들에게 심심한 조의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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