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에 짓밟혀 버린 원칙

'임대호는 소심한 은행원이다. 행동거지는 굼뜨고 말은 어눌하다.
그래서 약삭빠른 시류에 낙오하기 십상이다. 반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늘 '동네북'이 된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기 마련이다. 천덕꾸러기나 다름없다.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쪼이고 밖에서는 여자에게 휘둘린다. 동네 불량 청소년들을 보면 잽싸게, 그리고 용감하게(?) 줄행랑 치고 집에서는 아버지한테 찍혀 '찍소리' 못하고 살아가는 한심한 셀러리맨이다.

그러던 그가 프로레슬러로 변신하여 '타이거 마스크'란 가면을 쓰면서 야비한 공격성향의 '반칙 왕'이 된다. 가면은 그에게는 새로운 자신감이며 용솟음치는 용기의 용광로다.'

2000년 3월 개봉하여 폭발적 흥행을 기록했던 코미디 영화, '반칙 왕'(감독: 김지운)의 줄거리다.

'사회적 반칙'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살아야 했던 소심하고 무기력한 주인공이 '반칙의 스포츠(?)'라 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에 입문하여 '악랄하고 무자비한 반칙'으로 사각의 링을 휘젓는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의 코미디물이다.

'반칙'을 통해 '반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복수한다는 역설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반칙이 원칙을 짓밟아버리고 순리가 변칙에 의해 속절없이 깨어져 버리는 사회현실에 대한 통렬하고 신랄한 풍자다.

웃음 뒤에 감춰진 진짜 눈물

코미디의 본령은 웃음이다. 풍자와 해학을 통해 마음속의 웃음보를 흔들어 깨우는 데 있다.
그래서 허파가 찢어지는 웃음 뒤에는 생리적 눈물이 절로 따른다. 그러나 이 생리적 눈물 속에 감추어진 진짜 눈물을 짜 올리는, 그래서 그 정체를 꿰뚫어 보는 심미안, 그것이 바로 코미디의 본질이다.

'반칙 왕'도 마찬가지다. 그 웃음 뒤에는 처절하고 슬픈 페이소스가 진하게 묻어난다.
그렇다면 새해 초입의 화두(話頭)가 왜 하필이면 '반칙 왕'인가. 이유는 있다.

'반칙 왕'이 던지는 역설적 메시지를 통해 2004년 한해를 새롭게 다스리자는 뜻에서다.
레슬링의 사각 링보다 더 살벌하고 온갖 야비한 부조리와 반칙이 지배하는 사회현상에 경고음을 보내고 고발하자는 데 있다.

반칙이 원칙을 찢어발기고 온갖 행태의 편법과 불법과 탈법이 순리와 정의와 진실의 목을 찍어누르는 '악의 세력'에 '헤드 락'을 걸고 링에서 퇴장시키자는 것이다.
그래서 '반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염원에서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가 희망이다.

지금 사회는 온통 '반칙 왕'들의 무대가 되고 있다. "모두가 도둑놈"이란 말도 있다.
이를 그대로 뒀다가는 나라꼴이 차 떼기로 '악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관용도 지나치면 무책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있다.
호루라기를 부는 일이다. 반칙에 호루라기를 불고 잘못에 호루라기를 부는 일이다. 탈법과 불법과 편법에도 호루라기를 불어야 한다.

특권과 기득권과 반칙으로 세상을 주무르고 행세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호루라기를 부는 일이다. 백성을 우습게 여기는 오만한 권력층에도 경고를 보내야 한다.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세력과 부도덕하고 수치를 모르는 탐욕한 지도층을 향해서도 불자.

호루라기 소리는 함께 발맞춰 나가는 질서와 준법의 신호음이기도 하지만 반칙을 일깨워 퇴장을 예고하는 경고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양심에 대고도 불어야 한다. 내 가족, 내 친구와 내 이웃의 잘못을 봤을 때도 불어야 한다.

이른바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부패 친화적 연고주의'에 연연하여 경고의 호루라기 불기를 주저하다가는 '반칙 사회의 늪'에서 헤어날수가 없다.

각종 인연에 대한 관용과 이해심도 지나치면 무책임이 된다. 잘못을 보고도 못 본 척, 불의를 알고도 모른 척 외면한다면 그것은 바로 무관심을 뛰어넘는 무책임이다. 그것은 좋은 인연일수가 없다. 악연을 키우는 일일뿐이다.

'사회적 반칙'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래서 호루라기를 불자. 그리하여 반칙의 세력에게 경고음을 보내야 한다. 누구든 반칙을 하면 퇴장시켜야 한다. 사회공동선을 짜 올리기 위함이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서다. 순리와 상식이 통하는 살 맛 나는 사회를 위해서다.

호루라기는 우리의 양심이다. 부패하고 어두운 악의 세력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다. 백성의 호루라기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마침 4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우리가 부는 호루라기가 얼마나 많은 '반칙 왕'들을 적발하고 선거 판에서 퇴장시킬지는 힘은 없지만 착하게, 그리고 가난하지만 인정을 나누며 정의롭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백성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그래서 2004년에는 호루라기를 불자. 휘슬을 불자.

<김덕남의 대기자 칼럼>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