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모리 3] 제주 상모리 군사 요새를 통해서 본 '결7호 작전'

▲ 알뜨르 알뜨르는 상모리 해안 가까운 곳에 있다. ⓒ 장태욱 알뜨르

대정읍 상모리 해안 가까운 곳에 '알뜨르'라는 곳이 있다. '알'은 아래쪽을 '뜨르'는 마을 혹은 동네를 말한다. 과거 이곳에는 알오름동, 저근개, 골못, 광대원 등의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금은 그 마을들이 모두 사라지고, 넓은 평원에 농지가 자리 잡고 있다.

알뜨르 비행장, 일제 군국주의 망령의 상징

▲ 격납고 일제가 알뜨르 비행장에 만든 격납고의 모습이다. ⓒ 장태욱 알뜨르 비행장

한없이 평화롭게 보이지만, 이 평원에서 송악산 해안에 이르는 알뜨르 구석구석에는 일제가 남겨놓은 군사시설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알뜨르를 군데군데에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군사시설은 일제가 사용했던 비행기 격납고들이다. 당시 20개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19개가 제 모습을 유지한 채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격납고는 폭 20m, 높이 4m, 깊이 10.5m 정도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격납고는 비행기를 보관하거나 수리하는 용도로 썼다고 한다. 해방 후, 주민들이 밭을 일구기 위해 이 구조물을 부수려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중 포격에 대비해서 지었던 만큼, 단단하게 지었던 것이다. 이 격납고들은 일제가 1943년 11월과 12월 두 달에 걸쳐서 만든 것들이다.

▲ 알뜨르 비행장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전진기지로 만든 비행장이다. ⓒ 장태욱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가 있다는 것은 이 일대에 비행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푸른 초지에 가려 활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알뜨르는 활주로를 갖춘 비행장이 있는 자리다. 제주도를 군사요새로 활용하고자 했던 일제의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설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군은 제주도 내에 성산포와 마라도에 군인 약간 명을 주둔시켰을 뿐, 군사적으로 제주도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처음으로 이곳에 20만평 규모의 해군 비행장을 건설했다. 그 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제주에 대한 일제의 인식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1937년 8월 일본군은 중국의 광둥·장저우 등을 대대적으로 폭격하였다. 당시 일본 항공기들은 나가사끼현의 오우무라 항공기지에서 출격했지만, 폭격을 마치고 귀환할 때는 제주도 항공기지로 들어왔다. 그 후, 일본군이 난징·상하이 등을 폭격해서 함락시키는 와중에는, 제주를 해양 폭격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원래 20만평 규모로 시작된 비행장은 1945년 8월에 일제가 패망할 당시 80만평으로 확장되었다. 원래 이곳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던 주민들은 보상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삶의 터전에서 내몰려야 했다. 

일제가 알뜨르비행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게 된 배경에는, 태평양전쟁에서 수세를 면치 못하던 일본군이 최후의 일전을 치를 장소로 제주를 선택하는 이른바 '결7호'라는 작전이 있었다.

'결7호' 작전, 제주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 일제가 상모리에 남긴 군사 시설 상모리 알뜨르 비행장 일대는 일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군사기지였다. (섯알오름 탄약고터 입구에 있는 표지판에서 촬영) ⓒ 장태욱 군사요새

1941년에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1944년에 이르러서는 연합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잠수함과 공습기가 일본 본토 가까이 접근하면서 일본군을 위협했고, 1944년 7월에는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사이판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군부는 종전협상에서 천황제를 유지와 일본 본토 사수 등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미국이 일본 본토를 침공하려는 길목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려 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 가능한 두 가지 경로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사이판과 괌을 기지로 일본 동남부 간토평야로 상륙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필리핀에서 오끼나와를 거쳐 제주도를 점령한 후 규슈에 상륙하는 것이다. 일본이 이런 전략적 판단에 따라 만든 작전이 '결7호 작전'이다.

1945년 2월에 이르자, 일본의 방위총사령관은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최후의 결전 내용을 담은 암호명 '결전작전'을 하달했다. 이 작전은 1945년 6월경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총 7호로 구분되었다.

그 중 '결1호 작전'은 홋카이도(北海道)를, 지시마(天道) 방면을, '결2호 작전'은 토후쿠(東北) 일본방면을, '결3호 작전'은 간토(關東) 방면을, '결4호 작전'은 토카이(東海) 방면을, '결5호 작전'은 츄부(中部) 일본 방면을, '결6호 작전'은 규슈(九州) 방면을, '결7호 작전'은 제주도 방면을 대상으로 하였다.

1945년 2월 시작된 유황도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한 달 넘는 전투 끝에 1945년 3월 25일에 미군에 섬이 함락되었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1945년 3월 일본최고전쟁지도자회의인 대본영은 결호작전 중에서 결1호와 결7호를 중점을 두고 다뤘다. 미군의 상륙이 제주도나 홋카이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추축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결7호 작전' 준비요강이 한반도를 관할하던 일본군 제17방면군에게 하달되었다. 그리고 1945년 4월에 이르자, '결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죽음의 임무를 띠고 일본군이 제주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945년 1월에 1000여 명에 불과했던 제주도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력이 4월이 되자 3만6000여 명으로 늘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제주도로 들어왔던 일본군 부대는 '제58군'이다. 제58군에 예속된 주력부대는 제96사단과 제111사단 등 3개 사단이었고, 그 직할부대는 사령부를 포함해, 전신부대·공병대·병참병원·비행장경비대 등 14개 부대였다. 제17방면군은 제주도 전역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흥미를 끄는 대목은 1945년 4월 23일 일본군 제17방면군과 제58사령부 사이에 제주도민의 조선 본토로의 이주에 대한 협의가 진지하게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군부는 제주도 전역을 '불바다'로 만드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차 병력집결에도 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일본 군부는 관동군 예하부대였던 제121사단을 제주에 추가로 배치했다. 제121사단은 병력 1만4700명 규모로, 기관포와 로켓포 등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그 와중에 6월 25일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었다. 미군의 제주도 공략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조선 본토에 있는 일본군 부대들을 추가로 제주도로 불러들였다. 종전 시까지 일본인 7만5천여 병력이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한편 결7호 작전 준비 말기인 1945년 6월에 한국 전역에 면장을 책임자로 내세운 국민의용대가 조직되었다. 징용보다 간단하게 주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체제였다. 일제는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주도민의 노동력은 물론이고, 가축이나 토지 등 주민들의 모든 것을 강제로 차출했다. 

전쟁 말기에 제주도를 유린했던 일본 군국주의

▲ 섯알오름 탄약고 터 일제가 알뜨르 비행장 인근에 지었던 타약고가 있던 자리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 장태욱 군사요새

일본군은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등을 주력으로, 도내 전역에 배치되어 요새구축과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비행장 건설, 군용도로 건설, 토지 강제수용, 강제징용, 강제노무동원, 식량 민 보급품 공출, 주민 전투대세 구축, 주민 통제 등을 통해 제주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알뜨르 인근의 대부분 군사시설도 태평양전쟁 말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알뜨르비행장 활주로 동쪽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는데 이름이 '섯알오름'이다. 섯알오름에는 원래 탄약고가 있었는데, 서쪽 봉우리 한 구석이 크게 함몰되어 있다. 패망할 당시 일제가 탄약고를 폭파시켜 오름이 무너진 것이라고 한다. 이 섯알오름 탄약고 터는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를 집단학살했던 장소로 더 유명해졌다. 지금은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 갱도진지 섯알오름의 두 봉우리 사이에 있는 갱도진지의 모습이다. 잡목과 풀이 우거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 장태욱 군사요새

섯알오름의 두 봉우리 사이에는 골짜기처럼 보이는 깊은 웅덩이가 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 보면 그 내부에 굴이 보이는데, 잡목과 풀로 뒤덮여 접근을 할 수 없다. 당시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동굴요새였다.

 

▲ 고사포 진지 섯알오름 꼭대기에 서면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일제는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알뜨르 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해 이곳에 고사포진지를 구축했다. ⓒ 장태욱 군사요새
  
  
▲ ▲ 일제가 설치했던 고사포 당시 설치했던 고사포의 사진이다. 당시 사진에도 멀리 산방산이 내다보인다. (안내 표지판에 있는 사진을 촬영) ⓒ 장태욱 군사요새

섯알오름 동쪽 봉우리 정상에는 마치 병뚜껑을 뒤집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두 개가 있다. 깊이 1.5m, 지름이 4.3m에 대공포진지인데, 일제가 미군의 공습으로부터 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군사시설이다.  당시 이곳에는 고사포와 고사기총이 배치되었다. 속을 들여다 보니, 출입구 한 개와 사람이 몸을 숨길 만한 구멍 열 개가 있다. 주변에 있는 마라도·가파도·송악산 등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알뜨르 남쪽 해안에 있는 송악산에도 진지동굴이 남아있다. 제7결 작전에 의해 만들어진 동굴들인데, 이곳에 총 15개가 남아 있다. 미군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어뢰와 폭탄을 실은 소형보트를 숨기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국민의용대가 조직되자, 이 동굴을 만들기 위해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삽과 괭이를 들고, 굶주림과 일제의 매질에 견디며 강제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진지동굴은 입구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높이 2.5m정도에 깊이가 9~10m 정도 되는 듯했다. 이런 진지동굴은 송악산에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계리와 화순항으로 이어지는 해안으로 줄을 이어 만들었다. 제주도 오름과 해안 100개소에 각종 진지를 포함한 요새들이 구축되었는데, 현재 발견된 진지동굴이 700여 개에 이른다. 

 

▲ ▲ 진지동굴 안에서 바라본 모습 송악산 진지동굴 안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이다. 멀리 형제섬이 내다보이고, 그 앞을 마라도행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 장태욱 진지동굴

일제의 치밀한 준비에도 제주도에서의 최후의 일전은 치러지지 않았다. 전쟁은 '원폭투하'라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섬이 전쟁의 불바다가 될 위기를 넘겼으니, 그 결과가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일제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제주도 전역을 요새로 만드는 와중에, 인권과 재산권을 박탈당했던 주민들의 가슴과, 제주도 천혜의 환경에는 여전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아있다.

게다가 일제는 '제주불바다'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패망했지만, 제주 4·3와중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방부가 제주를 불바다로 만들었으니,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이 섬의 운명이었나 보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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