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편지(6)] 겨울속으로 걸어가다

▲ 꽃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화려했던 한 해를 접고 숙명처럼 닥쳐오는 겨울속으로 걸어가는 저 나무들의 담담(淡淡)함을 가슴에 담아봅니다.ⓒ오희삼
설(雪)님이 오시려나 봅니다.
올겨울 첫눈이 마침내 오시려나 봅니다.
가슴 졸이며 누군가를 조마조마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첫눈을 기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그저 응결된 빗방울이 굳어서 내리는 눈송이일 뿐인데 말입니다.
첫눈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 연인에게 전화를 하고
기분 좋은 일 없어도 그저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하던 일 잠시 멈추고 그저 멍하니 눈내리는 허공을 응시하고
퇴근 길 스스럼없는 벗에게 전화해서 술 한잔 하자며 약속도 하고....
그런 추억 하나쯤은 품고 계실 테지요.
▲ 눈이 없는 겨울산은 어딘지 초라해 보일것 같습니다. 순백의 고운 숨결로 세상의 티끌을 하얗게 색칠하는 눈이야말로 겨울날 낭만의 축제에 뿌려지는 축복같은 것이겠지요.ⓒ오희삼

아주 느린 속도로
바람의 기류에 몸을 맡기고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에선
세상의 번잡함을 잊게 해주는 마력이 숨어 있나 봅니다.
순백의 고운 숨결로 세상의 티끌을 하얗게 색칠하는 눈이야말로
한겨울 낭만의 축제에 뿌려지는 축복같은 것이겠지요.
눈 없는 겨울산은 어딘지 초라해 보일 것도 같습니다.
겨울이라는 수면기에 생명있는 것들의 영원한 자궁인
대지를 감싸주는 따뜻한
솜이불 같은 존재가 바로 눈이 아닐런지요.
그 차가운 눈 속의 대지는
봄날의 부활을 예비하는 생명들을 보듬었을 테지요.
젖을 먹이며 자식을 살리는 모성애처럼
대지는 흙속에 피신한 생명의 싹들을
그 차가운 눈이불 속에서 키워낼 것입니다.

▲ 화구벽의 바위들마다 바람이 할퀴고 간 상흔처럼 서리꽃이 만발했습니다.ⓒ오희삼

부쩍 잦아진 서리꽃 나무마다 피어나고
야윌대로 야위어 줄기만이 앙상한 억새수풀도
서리꽃의 방문에 가녀린 몸뚱이를
대지로 엎드리며 한해를 마감합니다.
용암으로 들끓었던 화구벽의 단단한 바위도
바람의 손금에 들숨 멈추고,
우듬지를 스치는 산들바람에도 제 몸 부비던 고채목의 적갈색 가지들도
오늘은 하얗게 하얗게 철갑옷으로 꽁꽁 치장했습니다.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구상나무들
줄기며 푸른 잎새마다 서리꽃으로 덮어쓰고
한라산을 지키는 동장군처럼 서있는 모습이 오히려 늠름합니다.

▲ 빙하기를 견디어낸 한라산의 구상나무는 한겨울 눈보라에도 꿋꿋하게 숲을 지키는 한라산의 동장군입니다.ⓒ오희삼

단 한 장의 잎새도 남김없이 낙엽을 떠나보낸 나무들은
이제 줄기마다 겨울눈을 트고
고립의 겨울잠속으로 기나긴 잠행(潛行)에 들어간 듯 합니다.
꽃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화려했던 한 해를 접고
숙명처럼 닥쳐오는 겨울속으로 걸어가는
저 나무들의 담담(淡淡)함을 가슴에 담아봅니다.
겨울눈 속에 새잎을 틔울 희망의 씨앗을 품고
혹독한 겨울의 시련 앞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몸을 세우는
저 숲의 유장(悠長)한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 단 한 장의 잎새도 남김없이 낙엽을 떠나보낸 나무들은 이제 줄기마다 겨울눈을 트고 고립의 겨울잠속으로 기나긴 잠행(潛行)에 들어간 듯 합니다.ⓒ오희삼

하얀 백지 위에 어릴 적 새겼던 소박한 꿈들은
세월의 더께 속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가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규칙에 조금씩 물들어가며
욕망의 전차에 아등바등 매달려 질주하는 자화상이
시린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만 같아서 때로 서럽습니다.

▲ 우듬지를 스치는 산들바람에도 제 몸 부비던 고채목의 적갈색 가지들도 오늘은 하얗게 하얗게 철갑옷으로 꽁꽁 치장했습니다.ⓒ오희삼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유유히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무라는 존재.
겨울 앞에서,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을 걷으며
겨울의 칼바람 속에서도 꿋꿋한 나무들의 의연(毅然)을 배우렵니다.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詩)를 본 적이 없다’는
시인의 노래가 겨울숲에 메아리로 울립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겨울이건만
마주대할 적마다 달라보이는 모습은 무슨 때문인지요.
아마도 흐르는 세월의 궤적 따라 지내온 우리네 삶의 흔적들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은 아닐런지요.

▲ 겨울산을 떠나 먹이를 찾아 하산해야 하는 산노루.ⓒ오희삼

감귤 수확이 끝난 과수원엔 으레
나무마다 잘 익은 한 두개의 귤이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한 겨울 먹이를 찾아 헤맬다닐 새들을 위해
감귤나무 한구석마다 열 매 한두개쯤 일부러 따지 않고
남겨둔 농부의 마음일테지요.
무릇 생명 있는 것들에 베푸는 배려의 마음들이 있어
이 겨울에도 따뜻한 훈풍이 불겠지요.

▲ 나무가지의 벌레를 찾아나선 박새.ⓒ오희삼

뺨에 앙증맞은 하얀색의 털이 인상적인 박새가족이
겨울이 다가오는 고요한 숲속을 부지런히 날아다닙니다.
‘쯔삐 쯔삐 쯔쯔삐 쯔쯔삐’ 쉴새 없이 지저귀며
나무등걸에 들러붙은 해충을 잡아먹으며
힘겨운 겨울살이를 이어가는 듯합니다.
겨울을 나기위해 산 아랫마을로 먹이를 찾아
힘겨운 여정을 감행해야만 하는 노루와 달리,
박새들은 쓸쓸한 바람만이 가득한 겨울숲의 요정인 양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다니며 노래를 불러댑니다.

▲ 눈이 없는 산중턱에서 엉겅퀴의 삭은 줄기를 먹던 노루.ⓒ오희삼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속절없이 흐르는
정직한 시간들이 조금은 야속해질 때가 있습니다.
스치듯 흘기며 읽다가 전율처럼 마주친 신문기사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현재의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 겨울눈 속에 새잎을 틔울 희망의 씨앗을 품고 혹독한 겨울의 시련 앞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몸을 세우는 저 숲의 유장(悠長)한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오희삼
겨울은 어쩌면 우리가 잘못 보내고 있을지 모르는 시간의 궤도를
수정해보라는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해준 선물이 아닐런지요.
깊고도 추운 겨울이 지나야
따뜻한 봄날이 오겠지요.
추워도 당당히 걸어갑니다.
겨울의 적막속으로. 나무들의 의연한 마음과 함께 말입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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