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 교수, 제주민화 단절한 추사, 전쟁의 고통 외면한 이중섭 ‘비판’

▲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
제주의 유배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인물을 고르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가 꼽힌다. 

추사는 9년간 제주 유배생활을 통해 불세출의 명작 ‘세한도’를 그렸고, 추사체를 완성했다. 또 많은 제주지역 유생들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문리를 깨우쳤고 세상에 눈을 뜨게 했다.

세기를 달리해 해방이후 4.3이라는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며 긴 동면에 빠진 제주미술계의 눈을 뜨게 한 미술가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중섭이다. 원산에서 국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후 제주까지 건너온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등 많은 작품을 남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한 예술인은 유배로, 또 한 미술인은 피난으로 제주를 찾았던 이들은 제주예술계에는 이제 우상(偶像)이 됐다. 대정에는 추사적거지가 있으며, 서귀포에는 이중섭의 거리가 있다. 제주문화예술의 자긍심을 한층 높여주는 예술인들이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는 제주민화의 자주성을 단절시키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중섭은 당시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고통은 외면한 현실 도피적 예술인이라는 평가가 제기돼 주목을 끌고 있다.

제주대 김현돈 교수(철학과)는 탐라문화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탐라문화(耽羅文化) 제25호에 실린 ‘제주를 찾는 외지미술인’ 논문을 통해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추사와 이중섭은 우리에게 신화가 됐으나 이제 신화의 구름에서 역사의 현실을 그들을 끌어내려 이성의 광장에서 밝은 빛은 쪼이게 해야 한다”며 추사 김정희 이중섭의 ‘다시보기’를 시도했다.

▲ 추사 김정희 영정
김현돈 교수는 “제주지역에서 볼 수 있는 근대미술 최초의 맹아는 조선시대 화공들이나 민간인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무속화나 민화에서 나타나며 무속신앙과 화조, 풍속, 산수 등을 그린 그림들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가에 널리 퍼졌으나 숙종조에 이르러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적 이념에 반한다는 명목으로 이형상 목사에 의해 사찰과 신당을 파괴할 때 훼철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10신위의 무신도는 그 이전 세조 년간에 그려졌던 모본(母本)을 18세기 이후에 복원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제주의 민화에 대해 봉건사회 해체기에 봉건사회를 극복하려는 민중들의 자각적 의식이 건강한 미적 정서로 표출된 시대 양식으로 진단했으며, 제주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제주 무신도나 관덕정 내 대들보의 ‘십장생도’ ‘적벽대전도’ 등의 벽화, 그리고 ‘풍속도’ ‘어락도’ 등의 민화에는 제주도민의 소박한 삶의 정서가 표출됐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이런 민화의 맥이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서 보냈던 9년의 유배기간을 거치면서 단절됐다고 분석했다.

추사의 유배생활은 문학·예술분야에서 이른바 제주 ‘유배문화’를 꽃피워 지역의 유생들을 계몽, 교화한 긍정적 기여를 한 반면, 남종 문인화가 유생들에게 전파되면서 민중의 건강한 생활정서가 담긴 민화를 속된 그림으로 천시하는 왜곡된 미의식이 조장된 부정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현돈 교수는 “제주미술의 근대성은 추사 김정희로 대표되는 유배문화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민화적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며 “건강한 삶의 정서가 무르녹은 민화의 구체적 현실성은 추사가 이식한 문인화풍의 추상적 관념성으로 희석돼 제주 미술문화의 자생적 전통으로 계승될 수 없었다”면서 추사 김정희가 제주전통의 민중문화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김현돈 교수는 이중섭에 대해서도 재조명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대표적 작품인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해초와 아이들’ ‘물고기가 그려진 소’ 등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한결같이 낙천적이고 온화해 전쟁의 불안감이나 생활의 피폐함, 고통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고 봤다.

▲ 이중섭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그는  “ 그것은 아마 지리적으로 전쟁의 상흔에서 가장 멀리 비켜난 서귀포 지역의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 체험에서 여과된 것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피난생활의 곤핍함을 향수 어린 낭만성으로 억누르고 절제하기 위한 창작의 한 방편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중섭이 제주 피난시절 같이 왔던 화가들이나 제주지역 예술인들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서귀포 마을에서 외톨이가 되어 혼자만의 생활을 즐겼다고 평했다.

1997년 서귀포시의 노력으로 이중섭이 살던 서귀포 집이 발견되고, 현지에 기념관이 꾸며져 언론의 조명을 받을 때까지 제주도민들에게 까맣게 잊혀진 인물로 서귀포시가 이중섭이 기거하던 집을 복원하고, 그 일대를 ‘이중섭 거리’로 명명할 당시 일부 미술단체에서 반발한 이유 중의 하나에는 이중섭이 가진 이런 ‘외골수’의 생활태도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김현돈 교수는 이 논문의 결론을 빌어 추사 김정희와 이중섭에 대해 현실적인 냉혹한 비판을 가했다.

▲ 이중섭
김 교수는 추사로부터 세상에 눈을 뜨게 된 제주의 유생들이 제주 문화·예술의 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으나, 그러나 유교의 숭문사상에서 우러나온 문기에 과도하게 매몰돼어 사경보다는 사의에 치중한 청조 남종 문인화의 저인은 이식한 추사류의 ‘유배문화’가 그 이전 민중적 미의식에 기반을 둔 무속화와 민화의 자생적 전통을 훼손시키고, 우리 미술사의 자주적 발전에 걸림돌이 된 부정적 측면은 냉정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추사가 타고 난 사대부 양반 지식으로서의 넘을 수 없는 세계인식의 한계를 짐작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중섭에 대해서도 이 같은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평했다.

이중섭 예술 세계의 대부분이 전쟁의 비극 속에서 담금질 됐으며, 제주, 부산, 통영을 전전한 피난 시절의 그림에서 소박한 민족적 미의식과 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고뇌를 읽을 수 있으나 그의 그림 속에서는 한국전쟁이란 비극적 상황에 대한 역사의식의 흔적이나 현실에 대결하는 치열한 작가의식은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다.

특히 서귀포 시절의 풍경화에는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픈 현실도피적인 미의식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쟁이 부과한 개별적인 체험의 정서가 보편적인 미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했으며, 이 문제는 앞으로 이중섭의 평가 작업에 계속 쟁점으로 남을 만한 일이라는 게 김현돈 교수의 시각이다.

김 교수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추사와 이중섭은 우리에게 신화가 되었다. 신화는 진실의 빛을 거부하는 우상이며 맹목이다. 신화에 매몰되면 대상과의 비판적 거리는 말소된다. 신화의 구름으로부터 역사의 현실로 그들을 끌어내려 이성의 광장에서 밝은 빛을 쪼이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 후학들에게 남겨진 가장 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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