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뉴패러다임 관광의 치명적 역주행 '카지노·경빙'

시간에 대한 중세인의 태도를 ‘시간에 대한 거대한 무관심’으로 요약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Bloch)의 관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경사회의 공통적인 시간개념이다. 즉, 농번기에는 일출 직후에서부터 일몰 직후까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이 노동에 소요되는 반면 동절기 또는 우천 등의 기상조건에서의 하루 일과는 휴식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농경사회의 시간개념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에 순응하는 시간개념에 일대 변혁을 준 시계의 발명으로 인간의 생활리듬은 자연이 아니라 기계적 시간에 적응토록 요구되었다. 즉, 당시 마을의 중심공간이자 랜드마크인 교회 건물의 가장 높은 첨탑에 거대한 시계를 설치하여 모든 마을주민의 가시권 영역에 시계가 놓이게 되자 기계적 시간이 인간을 통제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산업혁명의 초기단계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육체를 기계적 속도에 맞추도록 강요되었다. 증기기관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기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자 인간육체의 한계로 여겨진 하루 평균 16-18시간의 노동시간이 일요일을 제외한 주 6일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견디지 못한 성인 노동자의 이탈이 심각해지자 통제가 용이한 어린이가 새로운 공장노동자로 대체된 이후 만 20세 미만의 사망자가 급증한 사회적 현상은 찰스 디킨스(Dickens)의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도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기계적 시간과 속도에 종속된 인간의 단면은 1926년 출시된 프리츠 랑(Lang) 감독의 영화 <메트로폴리스>라든지 찰리 채플린(Chaplin, 1936)의 대표작 <모던 타임즈>의 주제로 논의되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구 열강의 시선에서 바라 본 19세기 중반 조선의 이미지는 농경사회의 전형적인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약관 27세에 하원에 진출하여 35세에 대영제국의 외무차관, 그리고 39세에는 인도 총독을 역임한 조지 커즌(Curzon, 1894)이 묘사한 조선인은 치료 불능의 게으름이 배인 민족이며, 스웨덴 기자 아손 크렙스트(Crebst, 1912)가 묘사한 코레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낙천적이지만 일하는 것을 증오하는 민족이다.
이처럼 진보된 문명이라는 우월적 시각에서 묘사된 관계로 당시 선조들의 생활태도를 게으름으로 단정하였지만 실상 자연에 순응하는 낙천적 여유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배의 결과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연이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미미한 산업기반시설마저 초토화된 환경에서 신속한 경제성장은 생존과 직결된 지상과제로 수용되었다.
독재정권의 성장일변도 경제정책으로 인해 1980년대 중후반 ‘한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압축적 근대화(compressed modernization)를 자축할 수 있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사태는 일방적인 성장위주정책에 대한 자성의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즉, 정해진 할당량을 세계 최단기간에 달성하고자 하는 속도주의 접근방식으로는 성장의 한계(limit of growth)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성숙해지면서 무궁무진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콘텐츠 양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다.
 
속도주의 경제성장의 배경으로는 고학력의 저렴한 임금노동자원의 원활한 공급에 기인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이 신흥 개발도상국의 부상으로 인해 상쇄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모색되었다. 즉, 창의적인 사고방식에 기반을 둔 콘텐츠 산업의 특성은 목표달성의 수준을 계량 가능한 수치로 제시하지도 않고, 제시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기존 속도주의 경제관념으로는 변모된 환경에 적응할 수 없게 되었고, 변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일환으로 해외 장기여행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매년 증가하는 것처럼 한 템포 느리게 가는 방향이 정착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반영된 시발점인 2000년 번역 발간된 피에르 쌍소(Sansot)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필두로 <느림>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경제영역에서 촉발된 패러다임의 변화 범위는 거대할 뿐만 아니라 점증적인 속도로 진행되는 관계로 감지하지 어렵지만 실생활의 영역에서 느림의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패스트푸드의 천국인 미국에서도 학내에서의 패스트푸드 유입을 원천 금지하는 조치가 확산되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패스트푸드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이처럼 불균등한 영양으로 건강에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된 패스트푸드의 대안으로 전통 발효음식인 슬로푸드(slow food)가 부상하고 있다. 그리고 느림의 영향은 슬로푸드로 대변되는 식생활에서부터 걷기 신드롬이 형성된 레저활동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되고 있다.
 
▲ 느림의 미학, 느림의 관광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는 제주올래 .

느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제주관광의 패러다임을 변모시키고 있다. 관광가이드의 일사불란한 통제로 수십 명의 관광객을 대형 전세버스에 탑승시킨 채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제주도를 일주하는 방식으로는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이러한 전환기에 직면한 제주관광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 중에서 느림을 배경으로 한 탐방과 걷기활동이 유력한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탐방코스는 사전예약이 필요하지만 연일 최대수용인원에 육박하는 탐방객의 뜨거운 호응이 지속되고 있고, 천혜의 제주해안을 둘러보는 제주올래 탐방코스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칠십리 축제를 제주대표축제로 육성하기 위해 서귀포시에서 선택한 축제 주제인 불로장생의 기본전제도 느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주관광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느림의 의미에 기반하고 있다.
 
느림은 제주관광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사실상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속도에 집착하는 기존 패러다임의 사고방식으로 카지노와 경빙(競氷)사업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슬롯머신 동전투입구에 동전을 투입하고 버튼을 눌러 화면에 당첨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은 길게 봐도 30초에 불과하고, 6명의 고객이 착석한 카지노 테이블에서 1회 게임이 완결되는 소요시간도 불과 5분 이내면 충분하다.
이처럼 속도에 의해 개인의 행동이 통제되는 카지노는 새로운 제주관광의 패러다임인 느림과 정면 대치되는 개념이므로 제주관광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여 있다. 즉, 기존 패러다임의 틀에서 카지노와 경빙사업을 도입하든가, 아니면 활용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느림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제주의소리>
<문성민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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