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영어교육도시 예정지 구억리 3] 제주4.3당시 4.28평화협상의 현장

   
▲ 김익렬과 김달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김익렬이고 왼쪽에 있는 사람이 김달삼이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 장태욱

4.3이 일어나기 전에 구억리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1938년 지금의 구억리 상동인 8466-1번지에서 대정공립심상소학교 구억간이학교로 문을 열었다. 그후 1944년 대정공립북초등학교로 개칭된 다음, 해방을 맞았다.

해방 당시 이 학교는 3000여 평 정도로 넓은 운동장과 관사와 교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48년 11월에 소개령이 내려져 마을이 모두 불타 사라질 때, 학교도 함께 불타버렸다. 그 후, 마을 전체가 이전 살던 곳에서 남쪽에 재건됨에 따라 초등학교도 이전보다 남쪽인 889-1번지에 재건되었다.
  

▲ 성담 마을에 남아 있는 4.3의 흔적이다.  ⓒ 장태욱 

한편, 대정북초등학교로 불리던 학교는 4.3이 발발한 초기인 4월28일, 무장대 대표인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소속 9연대장 김익렬 중령 간에 평화협상이 맺어진 공간으로 역사의 무대에 잠시 등장했다. 평화 협상이 진행된 당시는 마을이 불타기 전이었다.

김달삼, 무장투쟁의 중심에 있어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에서 응원경찰에 의해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여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남로당 제주위원회의 지도 아래 3월 10일부터 총파업으로 맞섰고, 경찰은 이에 대해 대대적 검거와 이어진 폭행으로 인민들을 탄압했다. 

이 시기에 제주에서는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어 경찰보조단체로서 기능했다. 특히, 이북출신들로만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제주도민들에게 '악마의 그림자'였다.

한편, 1948년 1월 22일에 경찰이 신촌리 제주도당 조직부 아지트를 급습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경찰에 연행된 이들은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한 끝에 42일 만에 풀려났고, 남로당 조직은 경찰에 전부 노출되었다.

그러던 중 1948년 1월에 유엔은 '가능한 지역 내에서 총선거 안'을 상정하여, 남한 내에서의 단독선거가 불가피함을 알렸다. 이에 남로당은 2.7구국투쟁으로 맞섰다.

조직이 노출되면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처음에는 강경파와 신중파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러던 와중 1948년 3월, 경찰관에 연행되었던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로당 제주도당 내부에서 강경파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그들은 조직방어와 5.10단독선거 저지라는 두 가지를 목적으로 무장투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강경파의 중심에 김달삼이 있었다.

▲ 김달삼의 교원기록부 김달삼은 원래 대정중학교 교사였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 장태욱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인데, 당시 23세로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김달삼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은 그의 장인 강문석이 일제 때 김달삼이란 가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날 당시,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도당에 총파업을 건의해서 관철시키기도 했다. 이후, 남로당 중앙위원이자 선전부장인 장인 강문석의 후광으로 남로당 도당 조직부장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무장투쟁 과정에서는 유격대 조직을 총괄하는 군사부 책임을 맡았다.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제주도 산간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올랐다. 이를 신호로 무장대 350명은 도내 24개 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습격했다. 4월 3일 발생한 희생 규모는 경찰, 민간인, 무장대를 통틀어 사망 14명이었다.

무장봉기가 발생했을 때, 제주도 방어의 임무를 맡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이 사건을 도민들과 경찰․서청 간 충돌사건으로 간주하여 군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4월 17일에 제9연대에 진압작전에 동참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제9연대는 경찰과 더불어 합동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경찰은 무장대원들이 은신했을 혐의가 있는 집들을 습격하고, 경비대원들은 그 일대를 방어하는 방식이었다.

김익렬 사령관의 평화를 위한 노력

미군정은 무장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장대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맨스필드 중령이 유해준 지사,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제주도 민족청년단장 등에게 무장대 귀순작전의 책임자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들 겁이 났는지, 병에 걸렸다고도 하고, 연락도 없이 출장을 가버리기도 했다. 

결국 김익렬 연대장이 평화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맨스필드의 요청을 받은 김익렬 연대장은 즉시 무장대에게 보낼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로 살포했다.

"우리는 과거 반삭 동안에 걸쳐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생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은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만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 제지하여 주기 바란다."

그러자 무장대 측에서는 "연대장이 직접 나와야 하고, 수행인은 2인 이상은 안 되며, 무장대 진영이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답신을 보내왔다. 평화협상에 임하는 김익렬 연대장에게 맨스필드 중령은 미군정을 대리하는 일체의 권한을 일임했다. 
  

▲ 옛날 구억국민학교 터 해방 당시 이 학교는 운동장 3000여평을 갖춘 비교적 큰 학교였다.  ⓒ 장태욱

1948년 4월 28일 대정면 구억리 국민학교에서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다. 당일 오후, 협상 장에서 만난 두 사령관이 처음 나눈 대화다.

김익렬 : 제9연대가 지금까지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뜻과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개시한다.

김달삼 :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해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

김익렬 :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다.

김달삼 : 나도 제주도의 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마침내 평화협정은 맺어졌지만

이윽고, 두 사령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들이 우여곡절을 거치며 4시간동안의 협상 끝에 이끌어낸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72시간 내 전투를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

2.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3.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 교실 옛 터 당시 두 사령관이 협상을 하던 교실이 있던 곳이다. 건물은 밭의 주인이 새로 지은 것이다.  ⓒ 장태욱

저녁에 협상을 마무리한 김익렬은 제주읍으로 건너와 맨스필드에게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맨스필드는 크게 만족하며 전 경찰에 대해 외부 활동을 일체 금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양측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협상 사흘 만인 5월1일에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를 방화하는 '오라리방화사건'이 벌어지면서, 유혈충돌을 막기 위한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익렬 연대장은 오라리방화사건 직후, 유혈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경무대장과 육탄전을 벌이며 싸운 끝에, 5월 6일 해임되었다. 제주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한 미군정이 자신들의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해줄 새로운 사령관으로 박진경을 발탁했다.

5.10 선거에서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중 남제주군 선거구에서는 선거가 치러졌지만, 북제주군 갑·을 두 선거구에서는 주민들이 대거 선거에 불참함으로써 선거가 무효처리되었다.  제주도를 '빨갱이들의 소굴'로 인식한 응원경찰들이 대거 제주도로 몰려들었고, 새로운 9연대 사령관이 이들과 인식을 함께 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제주에 짙게 드리웠다.

▲ 해주대회에 참가한 김달삼 악수하는 이들 중 왼쪽에 있는 이가 김달삼이다. 그가 떠난 뒤 무장대 지휘는 이덕구가 맡았다.(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 장태욱

한편, 4.3이 발발하기 이전에 제주도 남로당의 노선을 무장투쟁으로 이끌면서 김익렬 사령관과의 평화협상에 마주 앉았던 김달삼은 1948년 8월에 일행 3명과 함께 제주를 떠나 북한으로 들어갔다.

북으로 들어간 이들은 8월 21일 열린 조선노동당 해주대회에 참가했다. 김달삼은 이날 대회에서 반헌영․홍명희 등 거물들과 나란히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고, 남한 측 대의원 360명을 뽑는 인민대표자대회에서도 안세훈,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등의 제주참가자들과 더불어 대의원에 뽑혔다. 김달삼이 제주를 떠나자 무장대 지휘는 이덕구가 이어 받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회, 아쉽다

4.28협상이 진행되었던 국민학교 옛 터는 지금은 과수원과 밭으로 변해있고, 입구에 아무런 안내문도 세워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던 옛 교실 터에는 그 후 밭의 주인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집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김익렬의 유고록 제주도에서 유혈 사태를 막기위해 노력했던 김익렬은 결국 해임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해 놓은 그의 유고집이 있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 장태욱

주민들의 귀중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의로운 군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할 것이다. 이 나라 군의 지도부가 시대에 뒤떨어져서 유치한 사고를 반복하는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기 때문일 것이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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