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뉴욕통신]혼자 그때 그 순간을 되새겨 봅니다--'가슴 아픈 크리스마스 선물'

▲ 대전형무소의 한 수형인이 사진을 찍고 있는 미군을 바라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1999년 5월경 나는 제주도 출신 고광림 박사의 자제분 중 한 사람인 고홍주(미국명 Harold Koh, Yale 법대 교수)씨가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성(Dept. of State) 인권차관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제주도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두 건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이 사건들을 진상규명을 하는데 미국정부 문서를 열람하고 싶다, 도와달라는 부탁을 간절하게 했다.

나는 당시 탐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투쟁과 한국정부 비밀문서 수집을 해 오고 있었다. 탐라대학에서는 이미 재임용에서 탈락된 상태였다.

나는 보따리를 싸서 모슬포의 동생집에 맡겨놓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0월 초순이었다. 집에 돌아온지 며칠 되지 않아 미 정부문서 보존소에서 한 학예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헤롤드 코'에게 편지를 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하였다. 거기에 오면 보관된 문서들을 찾는 방법을 도와줄 수 있다고도 했다.

나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자영업을 하고 있던 아내가 같이 가서 찾아보자고 따라 나섰다. 10월13일이었다. 한 학예관이 우리 부부를 3일동안 도와주었다. 3일째 되는 날, 미군 정보문서 목록에서 주요한 키워드들(political prisoner, execution)이 담긴 비밀문건 5건을 발견했다.

즉각 열람을 요청했으나 아직 비밀에 해제되지 않아 보여 줄 수 없다고 했다. 비밀문서 공개 요청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의해서 청구서를 내면 상당 시일이 걸리겠지만 아마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중 3건이 비밀해제되어 내 손에 도착한 날짜가 바로 오늘 12월 23일이었다. '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 처형(1950년 7월초)'  '서울에서 공산 게릴라 39명 처형(1950년 4월 20일)', ' 대구근교 부역자 처형(1951년 1월)'.

나는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와 제주4.3연구소에 이메일로 급히 알렸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문건에는 사진 18매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제민일보, 1999년 12월 24일 특보로 나감]

그 문건 목록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나의 심정은 '바로 이거다!' 50년 묵은 산삼을 초심자 심마니가 깊은 산중에서 발견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우편으로 배달된 누런 서류봉투를 개봉하고 그 문건을 들여다 보았을 때 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솟구쳤다.

나는 아내와 함께 로스 엔젤스에 3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 미주한국일보 한우성 기자를 만났다. 내가 발굴한 문건들을 들여다 보는 순간 그의 눈도 둥그레졌다. 발굴 경위를 소상히 인터뷰하고 나서 1주일 가량만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했다. 한 주가 지나갈 무렵 전화가 왔다. 이 문건을 기초로해서 기사가 완성되어 서울본사로도 보냈으며 KBS에도 나간다고 했다. 최종적으로 나의 OK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모든 자료들을 들고 서울에 나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밝히고 싶었다.

2000년 1월 6일 한국일보와 KBS를 통해서 전국에 알려졌다. 나는 1월 19일 서울 외신기자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국방부에서도 나의 직접 연락을 받고 영관급 3인이 나와서 경청했다.

만 5년이 지나가는 오늘 날,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이 총살되어 암매장 된 곳을 그냥 그대로 남아있다. 별다른 진척이 없다. 다만, 그 후 해마다 제주4.3 유족회 몇분들이 가서 위령제를 현장에서 지내는 정도이다. 현장 훼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가속화되었다. 그 학살터 위에다 교회를 지었다는 서글픈 뉴스도 접했다. 건축과정에서 유골들이 튀어나왔는데도 몰래 방기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내가 직접 수차례 찾아가서 접한 현장은 너무나도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학살터위에 채소를 가꿔서 먹는 '잔인'함인지 몰지각함도 목격했다. 뼈조각들이 농기구에 걸려 튀어나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욱 가슴아프게 만드는 '소문'은 '인골 가루나 기름이 불치병에 좋다'는 미신으로 도굴 유실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신으로 인한 유해유실은 전주형무소 '정치범' 학살터(황방산 기슭, 전주공동묘지 입구 왼편)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그 학살터위에 '기독교 안식관'을 세운 것 마져 대전 낭월동의 복사판이었다. 분노가 또 다시 솟구쳤다.

사람은 죽어서나 살아서나 '존엄성'은 매한가지가 아닐까?

하루속히 유골들이 수습되고 안장되는 그날을 바라본다.

관련 유족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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