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생애 첫 소풍에서 경험했던 차별의 아픈 추억

30여 년 전 제주도의 농촌은 급격한 변동을 겪고 있었다. 농민들은 보리 콩 고구마 등을 근간으로 하던 자급형 밭작물 농사에서 벗어나 더 큰 소득을 만들어내고자 귤농사에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이웃들은 밭농사가 잘 되지 않아 방치해 놓았던 땅에 과수원을 조성하며 부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땅 한 평 없던 우리 가족은 이런 꿈조차 꿀 형편이 못되었다. 가난의 터널은 좀체로 우리에게 그 끝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귤이 마을에 도입되어 '대학나무'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가난했던 우리 가정에는 설상가상으로 불화까지 겹쳤다. 어머니는 친정생활을 시작했고, 난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나의 학교생활은 이런 남다른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당시 글을 깨치지 못하고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공부를 그리 잘 하지 못했다. 학교에 입학하고나서도 매일 집 앞에 있는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고동을 잡고 노는 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빈곤과 가정불화로 끝이 보이지 않던...

▲ 위미초등학교 교정 내가 졸업한 학교다. 난 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차별에 대한 씁쓸한 기억이 남아 있다.

ⓒ 장태욱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두 달쯤 지날 때였을 것이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갑자기 책상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더니 아이들끼리 씨름을 시켰다. 며칠 후에 소풍을 가는데, 다른 반을 이기려면 우리 반에서 누가 씨름을 잘 하는지 미리 알고 뽑아야한다는 취지였다.

"소풍, 그게 뭐지?"

우리 집의 유일한 아이였던 나는 유치원을 다녀본 경험도 없어서 소풍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씨름을 소풍과 연관시키는 선생님을 보면서 소풍이 씨름을 하는 곳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당시 반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큰 아이였는데, 씨름에서는  나와 겨룬 모든 아이를 이길 수 있었다. 어린 아이에게 씨름에 대한 남다른 기술이 있었을리 만무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밥을 많이 먹었던 데다 일찍 수영하는 방법을 터득해서 여름 내내 바닷가에서 수영하며 놀았기 때문에 내 몸이 남보다 좀더 튼튼했을 뿐이다.

그 후로 난 우리 반에서 '씨름왕'이란 명성을 얻었다. 난 그 '소풍이라는 데'를 갈 날이 다가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위미초등학교 1학년 씨름 왕'이란 타이틀을 거머쥐는 달콤한 꿈이 며칠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소풍을 가기 전날까지도 난 그 소풍이 '씨름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옆집에 사는 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그 소풍의 실체를 일깨워주기 시작했다.

"너 소풍가려면 책가방 말고 소풍 가방을 들고 가야해. 그리고 가방에는 점심 도시락과 과자도 넣고 가야하는데, 너 가방과 도시락은 있어?"

이웃도 형제처럼 지내던 시절이었다. 할머니와 사는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그 이웃 형은 내가 남들처럼 소풍을 제대로 준비하고 갈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 형의 걱정이 내 마음속으로도 서서히 확산되어 왔다.

일찍이 과부가 되었던 할머니는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분이셨다. 친척 소유의 밭에 소작을 치면서 먹을 곡식을 마련하셨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마당에 있는 칙간에는 돼지를 키우셨다. 그리고 이른 새벽 고사리를 캐러 나가면 밤에 별을 보면서 돌아오시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어린 손자는 고단한 할머니의 일상에는 소풍과 같은 향락이 자리 잡을 틈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락도 없이 갔던 첫 소풍, 그래도 의기양양했다

▲ 맹살체육공원 '맹살'은 신례2리 새규내 가운데 솟은 둔덕이 평지를 이룬 곳을 이르는 말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 소풍을 왔던 곳이다. 최근에 방문해보니 체육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 장태욱
소풍가기 전날 밤 난 아침을 걱정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할머니는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며 나의 우려를 불식시켜 주셨다.

"내가 도시락은 못 싸주지만 100원 줄 테니 먹고 싶은 것 사고 가라."

당시는 삼양라면 한 봉지가 20원이었던 시절이다. 라면도 귀하던 시절, 할머니에게 받았던 100원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많은 용돈이었다. 난 동네 가게에서 과자와 사탕을 사서 이웃 형이 빌려준 가방에 집어넣었다. 과자를 가방에 넣으면서도 난 내 가방 속에 들어있는 할머니의 하사품들을 친구들에게 얼른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나 있었다.

하지만 교실에서 각자 가지고 온 소풍 가방을 과시할 때 본 내 소풍 준비물은 다른 아이들의 것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다른 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새 가방과 새 도시락 통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오색 김밥을 바라보자, 가슴 속에서는 어느새 수치심이 싹터서 '할머니 은혜에 보답하는 손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대신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수치심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문 것은 아니다. 난 걸어서 소풍 장소로 가는 동안 내내 오히려 의기양양해 있었다. 내겐 1학년 전체 어린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빛나는 씨름솜씨를 과시할 기회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1학년이 소풍을 간 곳은 신례2리에 있는 '맹살'이라는 곳이다. 신례2리는 샘물이 많이 나기 때문에 보통 공천포라고 부르며, 이 마을의 서쪽에는 '새규내'라는 하천이 흐른다. 새규내는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은 말라서 바닥을 드러내는 건천인데, 맹살은 새규내가 바다에 이르기 전에 내의 가운데에서 우뚝 솟은 둔덕이 평지를 형성한 곳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담임 선생님의 차별, 씨름 시합에는 출전도 못해

맹살에 도착하자 1학년 세 반의 아이들이 둘러않아 장기자랑을 시작했다. 예쁜 가방도 예쁜 도시락도 들고 오지 못했던 내게 자존심을 회복할 대 반전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장기자랑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각반에서 씨름선수 5명씩 출전하라고 했다. '1반의 씨름 왕'으로 이미 공인되었기에,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어린 아이가 기대했던 만큼 그리 공정하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평소에 반에서 씨름할 때는 순위에도 들어오지 못하는 아이들 5명을 불러서 출전시켰다. 선생님이 나를 찾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어서며 "선생님"하고 불러보기도 했지만, "앉아"라는 싸늘한 대답만 되돌려 받았을 뿐이다.

당시 선생님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것은 여러 해가 지나 내가  세상물정을 조금 이해할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그날 소풍은 학교에 입학한 이후 처음 맞은 행사였던지라 부모님들이 많이 따라오셨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펼쳤던 예선을 무시하게 된 이유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아이들 소풍에 따라와서 자리를 빛내주신 부모님'들의 시선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반 대표로 출전한 5명의 친구들은 모두가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이었고, 그 부모님들은 모두가 귤 재배를 일찍 시작해서 동네에서는 살 만하다고 알려진 분들이었다. 그날의 무대에 올라 박수갈채를 받기에는 나를 둘러싼 형편이 너무도 초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씁쓸한 치욕을 상쇄할 기쁜 일이 찾아와주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가 점심때 쯤 김밥 도시락과 과자를 가득 들고 오셨기 때문이다. 난 김밥과 과자를 맛있게 먹고 한없이 기쁘고 행복한 심정으로 소풍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모처럼 다가온 어머니의 사랑이 빈곤으로 인해 좌절하던 아이를 잠시나마 행복하게 했다.

우리는 자기 중심에서 편의를 추구하다보면 가끔 타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매사에 불편을 무릅쓰면서라도 원칙과 정도를 지키려고 노력할 때에만 무의식 중에 타인에게 차별의 상처를 입히는 일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이 되고자하는 청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