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자가 살아 남는다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

선생님.

이제 2009년이고, 그래서 제 나이 벌써 마흔 셋이네요.

어릴 적엔 마흔이란, 뒷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지긋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나이라 어림짐작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이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살면서 그냥 깨닫게 되네요.

선생님도 가끔 그런 생각한다고 하셨어요. 언젠가 같이 소주 마시면서 저의 이런 말에 선생님이 맞장구치시면서….

어릴 적 나이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면 항상 같이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어요.

바로 저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던 날의 기억이지요.

저는 어릴 적 참 작았어요. 남자아이 중에서는 제일 작았고 60여 명 되는 반 전체에서는 세 번째로 작았으니까요.

그런데 저의 아버지는 참 크셨지요. 올해 일흔 다섯이신데 키가 180cm으로 동네에서는 제일 크셨지요. 체격도 좋으셨고. 또 달리기는 얼마나 빨랐다고요. 게다가 얼굴까지 잘 생겼으니 요즘말로 하면 ‘훈남’이었지요.

그런 아버지는 저에게 있어 자랑스러운 존재와 더불어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거목 같은 그런 느낌부터 들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식에 저를 데리고 가셨지요.

그 전까지 누나들의 입학식에는 어머니가 가셨었고, 아들인 저의 입학식엔 당신께서 참석을 하신 것이지요. (밝히건대 저의 아버진 원체 남아선호사상이 심하신 분이랍니다.)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는 기억, 바로 제 초등학교 입학식 날엔 비가 왔었어요.

그래서인지 세 개의 교실 끝 벽을 떼어내면 강당이 되는 그런 곳에서 입학식을 했지요. 

그때 아버진 저를 데리고 강당의 맨 끝줄에 자리를 잡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마디로 짱 박혔던 것이지요. 저도 덕분에 맨 뒷줄에 앉아 한눈을 팔 수 있어 좋았어요. 제 옆에 선 거목 같은 아버지가 병풍같이 저를 가려 주었고 저는 빗물 고인 운동장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어요. 그러네요. 우리 초등학교 운동장이 물 빠짐이 안 좋아 비만 오면 운동장에 커다란 웅덩이가 만들어졌던 것도 새록새록 기억나네요.

사람들이 들어찬 강당에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해지고 더 이상 교장선생님의 길고 긴 말씀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 시작했어요. 전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느 틈엔가 우리 주위로 아버지의 친구들이 슬금슬금 건너왔고 그들의 자식들도 같이 자리에 앉아 있더군요. 다들 앞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매단 걸 보니 저와 같이 입학식을 치르는 초등학교 신입생이었겠지요.

전 다시 운동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깃발 없이 쓸쓸한 깃대와 구령대를 바라보고 있었었어요. 아마 지금은 더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있을 저밤나무라 불리는 구슬잣밤나무가 이따금씩 쏴아 하며 몸서리를 치는 것 같다고 생각도 했었지요.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예요. 제 달콤한 고독은 거기에서 끝이 났으니까요.

“야이 이겨 지크냐?” (얘 이길 수 있니?)

저도 몇 번은 본 적 있는 아버지 친구였어요. 맞아요. 희철이 삼촌….

희철이 삼촌이 저를 톡톡 치며 가리키는 아이는 아마 3학년이라고 해도 됨직한 덩치 큰 아이였어요.(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이는 희철이 삼촌 아들이었어요.)

참 이상도 한 일이죠.

희철이 삼촌만 저에게 물었는데 아버지를 위시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제 입으로 향해 있다고 느껴졌으니까요. 특히나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여태껏 느꼈던 든든한 바람막이 아닌 오히려 저를 애써 밖으로 밀치는 느낌마저 들었어요.

그것도 아주 강하게 “예”라고 대답하길 강요하면서 말이지요. 

아버지 친구들이 무슨 얘기를 하다 저에게 그런 물음을 던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허나 그때 느꼈던 것은 제 생애 처음으로 제 생각을 말할 기회였는데 자꾸만 아버지의 눈빛은 ‘아뇨’라고 하지 못하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만약 제가 ‘아뇨 이길 수 없어요’ 라고 하면 아버지는 ‘넌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구나’라고 할 것 만 같았고요. 

잠시 뜸을 들여 바라본 운동장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그때 문득 저 혼자 운동장에 비 맞고 서 있는 느낌이 들었던 건 무슨 이유였을까요?

“예 이겨 지쿠다.” (네 이길 수 있어요.)

저는 가급적 긴장을 감추려고 몰아서 대답했고 순간 아버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셨어요.

희철이 삼촌은 ‘어라 이게 아닌데...’라는 듯한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고 주위에 있던 아버지 친구들은 “이야!” 하면서 “야이 족아도 깡 세다” (얘 작아도 강단있다.)를 연발했어요.  
  

▲ 요리 체험 집에 조카가 놀러와서 음식을 같이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작은 것에서 느끼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 강충민 요리체험

선생님.

그때 전 아버지와 희철이 삼촌 그 주위에 있던 어른들의 그런 표정이나 환호성 흥밋거리 보다, 순간적으로 저와 우열의 대상이 되었던 그 아이의 얼굴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결단코 말하건대 전 그 아이를 이긴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그 후로 어떻게 됐냐구요?.

제 초등학교 교실 데려다 주는 당번인 둘째 누나 손에 이끌려 1학년 2반 맨 앞자리에 앉은  다음날, 그리고 누나가 5학년 자기 교실로 돌아간 걸 확인한 바로 그 순간

그 아이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 전날 저의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문제 삼고 한 판 붙길 원했어요. 

아, 그날 하루로 끝난 것은 아니에요.

가뜩이나 남자아이 중에 제일 작은데다 제일 힘 센 아이와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맞은 것까진 좋은데,  빤하죠. 제 암울했던 초등학교 1학년의 기억은….

참 비굴하게도 전 그 아이랑 서서히 타협하기 시작했어요. 자리 바꿀 때 까치발을 해서 그 아이 근처에 앉아 받아쓰기를 보여줬고 책가방도 몇 번을 들어주었어요. 

그러면서 집에 와서는 늘상 생각했어요.

“아 그때 이길 수 있다고 하지 말걸….”

언젠가 선생님과 술을 마시며 그 아이에게 아쉬움을 느낀다고 했었어요.

그 후로 고등학교를 다르게 다니며 소원하게 되었지만 학교에서 마주치면  초등학교 1학년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저 혼자만의 생각일 진 모르지만….)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만 아니었다면 전 정말 어릴 적의 추억을 고스란히 같이 하는 친구를 둘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 친구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요.  
  

▲ 태권도 대회장 아들 이 사진을 찍고 난 후 다음 경기에서 아들은 탈락했습니다. ⓒ 강충민 태권도 시합

선생님.

이제 저도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네요.

선생님께 큰아빠라 부르는 아들의 태권도 시합 날이었어요.

전 아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말 것을 주문하며 예리하게 상대편의 허점을 파고들어 공격하기를 주문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그리고 발차기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기합을 크게 주며 교묘하게 상대방이 위축되게 할 것을 나름대로 조언해주었지요. 순전히 어른의 잣대로요.

아, 그때 어린 시절의 저를 떠올렸어요.

저도 순간 35년 전의 아버지처럼 똑같이 어른의 잣대로 아들에게 가르치고 있던 것이었어요. 부끄럽더군요. 

어쩌면 저는 아들에게 한 번도 아름답게 질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던 것이지요. 

세 번인가를 이기고 탈락한 후 씩씩대며 분이 안 풀린 듯 끝내 울음을 터트린 아들에게 한 마디 해 주었지요.  “미안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진 않았어요.

한 번의 설명으로 아들의 마음을 바꾸게 한다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을 했고요. 지금껏 이기는 것에만 열광하고 아름답게 지는 법을 가르쳐 주지 못했던 제가 두고두고 그걸 아들과 같이 아파하고 고민해야 할 이제부터의 몫이라고 생각을 했던 거에요.

지금껏 아름답게 질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한 기간 만큼이요.  
  

▲ 날아갔던 물로켓포와 아들 힘차게 솟아 올랐던 물로켓포와 그걸 다시 주워오는 아들의 표정에서 묘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 강충민 물로켓포

선생님.

그런데 현실은 저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질 않네요.

무한경쟁만을 강요하며 “이긴 아이 밑의 수많은 진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는 전혀 없으니 말이지요. 대놓고 큰 어른들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하고 있어요.

35년 전에 어른들의 재미로 순식간에 승패를 강요받았던 저와 초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 그리고 아름답게 질 수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해 탈락에 분을 이기지 못해 눈물 흘리던 우리 아들…. 이 모든 아이들이 다 아파하네요.

아 가슴 아파서 어쩌면 좋을까요.

훗날 이 아이들에게도 “미안하다” 한 마디 하고 나면 너무 늦지 않을까요.

불현듯 소주 한 잔 하자며 전화할 지도 모르겠어요.

돈 버는 법은 전혀 얘기하지 않고 고전에서 현실을 보자던, 사람만을 얘기하던 선생님이 사셔야 되요.

덧붙이는 글 | 제주 참여환경연대 1월소식지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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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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