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편지(7)] 폭설 내린 한라산은 지금 온통 설국(雪國)

폭설 내린 한라산이 온통 설국(雪國)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 세상이 흰눈에 덮였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침묵에 잠기고,
흐르는 시간 마저도 눈 속에 잠겨 잠시 멈추어 선 듯 싶습니다.
그 침묵의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만이 산자락을 휘감습니다.
끊길 듯 멈추었다가 긴 호흡 끝에 터져나온 날숨처럼
바람이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지난 가을 낙엽을 모두 떨구어낸 겨울의 나무들은
온몸을 하얗게 분칠하고 겨울눈을 키우며 의연히 서 있습니다.
바람의 끝자락으로 희뿌연 안개들이 설원을 휘감고
풍경의 안쪽으로 불어간 바람이 화구벽 바윗골에서 뒤채입니다.

▲ 겨울산의 설원속으로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을 '러쎌(Russel)'이라 하지요.ⓒ오희삼
흰 눈 덮인 아득한 설원을 걸어본 적 있으신지요.
내딛는 순간 허리까지 쑥 허물어져가는 지친 몸을 일으키며 눈길을 헤쳐나가본 적 있으신지요.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사정없이 흘러내리고 무거운 배낭까지 짊어지고 한 발자국 옮기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겨울산의 깊은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은 말 그대로 웬만한 노가다 보다 더 힘든 노동이요 고행의 길입니다.
겪어본 사람이라면 아련한 기억속에 이마에 흐르는 땀범벅이 그리울 법도 할일입니다.

이렇게 겨울산의 설원속으로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을 ‘러쎌(Russel)'이라 하지요.
눈이 많은 곳에 사는 ‘러쎌’이란 미국 사람이 고안한 제설차량(러쎌차)에서 빌어온 등산용어입니다.
폭설이 내린 후 등산로가 눈에 덮인 후에 처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지요.
러쎌을 하지 않으면 등산로를 찾지 못해 길을 잃기도 하고 평소 10여분 걸리는 길도 1시간 이상 걸린답니다.
그래서 러쎌이 되어 있지 않은 산길은 대부분 등산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죠.

▲ 순결한 눈으로 가득 덮인 설원 위로 나의 발자국을 찍으며 걷는 길.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 고요한 방에 숨어있을 나를 찾아가는 길고도 먼 길일 것입니다.ⓒ오희삼
움푹 들어간 한 사람의 발자국에 따르는 이들의 발자국이 더해지고
또 뒤를 이어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디뎌질 때마다
눈길은 단단한 하나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설원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러쎌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드는 일입니다.
허리까지 빠지는 곳에서 한 걸음을 옮기는 것 조차 어려운 법이지요.
그래서 러쎌을 할 때는 서너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앞장을 서지요.
그래야겠지요. 
    
▲ 무릇 겨울산에 갈 때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깊은 눈속을 처음으로 걸어갔던 발자국 위로 흘리고 간 땀방울의 마음을 말입니다.ⓒ오희삼
앞장 서 걸어본 사람이라면
지금 앞장서서 걷는 사람의 숨소리에서
그 팽팽한 심연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러쎌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의 길이지요.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눈을 다지며 나아가는 발걸음은
누군가를 위한 절대희생의 길입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무아(無我)의 길입니다.
그래야 할 것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하나 되는 길일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러쎌이 주는 마음의 선물일 것입니다.
     
▲ 안개속에서 설의를 입은 듯한 구상나무들이 한 겨울 폭설에 잠겼습니다.ⓒ오희삼
무릇 겨울산에 갈 때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깊은 눈속을 처음으로 걸어갔던 발자국 위로
흘리고간 땀방울의 마음을 말입니다.
아득한 밤바다에 한 줄기 빛으로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는
등대지기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 폭설 내린 한라산이 온통 설국(雪國)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 세상이 흰눈에 덮였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침묵에 잠기고, 흐르는 시간 마저도 눈 속에 잠겨 잠시 멈추어 선 듯 싶습니다.ⓒ오희삼
누구도 가지 않은 설원을 걸을 땐 힘들고 지치지만
이렇게 누군가 다져놓은 눈길은 그야말로 환희의 길일 것입니다.
비탈진 곳에선 엉덩썰매도 타고 나무마다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설화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함께 간 벗들의 환한 웃음꽃 핀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으면
정말이지 세상의 근심은 모두 사라지고
가슴속에 무엇인가 꽉 들어차는 충만감이 들지요.
    
▲ 겨울숲에서 먹이를 찾아 나선 오색딱따구리.ⓒ오희삼
보온병에 담아온 모락모락 연기 피어나는
따뜻한 한잔의 커피맛은 또 얼마나 향기로운지,
이런 것이 겨울산행의 매력이 아닐런지요.
그럴 것입니다.
계절마다 산에 오르는 기분이 다르겠지만
유독 겨울산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시공(時空)의 감흥은
다른 계절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 나를 찾아서 오늘도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산을 걸어갑니다.ⓒ오희삼
겨울이 깊어갑니다.
바다는 사람을 들끓게 하고 산은 사람을 가라앉힌다지요.
순결한 눈으로 가득 덮인 설원 위로 나의 발자국을 찍으며 걷는 길.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 고요한 방에 숨어있을
나를 찾아가는 길고도 먼 길일 것입니다.
어쩌면 겨울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던져준 탑승권이 아닐런지요.
하얀 설원의 안개속 어딘가에 있을 나를 찾아서
오늘도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산을 걸어갑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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