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영락에서 산이수동까지

2월의 첫날이자 첫째 휴일, 오늘은 동료가 있다. 출발해야 할 지점이 멀어지는 관계로 지금까지 보다는 조금 더 일찍 나서야 했으며 버스를 타는 곳도 하귀에서 무수천으로 바꿔야 했다. 9시 20분, 골목을 나서자 마주 보이는 밭에는 계절보다 먼저 도착한 햇살이 대파를 캐는 할머니의 지친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마을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동료가 몰고 온 차를 타고 무수천으로 향했다. 서귀포행 버스에 몸을 싣고 창천에서 내린 다음 다시 영락리로,  해안도로에 들어서자 맨 처음 나를 반기는 이 있다. 여우의 눈이 얼마나 예쁜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처럼 예쁘게 생겼다 하여 여우콩이라 부르며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동안 변화하는 모습을 여우의 둔갑술에 비교하여 여우콩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우콩

갈매기떼 사이로 오도카니 앉아있는 가마우지 외롭다. 검은 잿빛에 제대로 날지 못하는 작은 날개를 가진 물새. 신선이 산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중국의 계림 지방엔 아주 순박한 사람들이 살았답니다. 이들은 먼 옛날부터 가마우지를 이용한 낚시를 생업으로 삼으며 오늘날의 가마우지 낚시법을 탄생시켰습니다. 가마우지 낚시란, 가마우지의 목 아랫부분을 끈으로 묶어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한 다음 가마우지가 잡아낸 물고기를 다시 꺼내는 낚시 방법을 이름입니다.

이른 새벽, 계림지방의 어부는 가마우지를 태우고 강 한가운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가마우지의 목을 묶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가마우지는 능숙한 솜씨로 물고기를 낚아 올립니다. 이렇게 물고기 몇 마리를 잡고 나서 어부는 가마우지의 목을 풀고 마음껏 물고기를 먹게 합니다. 저물녘이면 어부는 가마우지와 함께 노을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너무 늙은 가마우지는 더는 낚시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어부는 가마우지의 목에 손수 물고기를 넣어주며 삼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가마우지가 죽을 날이 가까워 오자 어부는 가마우지를 품에 안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돗자리를 펴고 조그만 상에 잘 익은 술 한 병을 올려놓고는 가마우지와 마주 앉았습니다. 말없이 가마우지를 바라보는 어부의 그윽한 눈에는 은혜와 감사의 정이 가득 담겼습니다. 어부는 정성스럽게 술을 따라 가마우지의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늙고 힘없는 가마우지는 어부가 먹여주는 그 한 잔 술에 주르륵 눈물 흘리며 긴 목을 땅에 늘어뜨렸습니다. 평생을 동고동락해 온 가마우지의 몸을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어부의 머리도 어느새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가마우지

겨울 속에 숨어 있는 햇살을 다 잡아내려고 주술이라도 거는 것 같은 선인장의 가시는 무섭다기보다 영롱하다.

백년초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을까? 바닷물에 제 한 몸 다 잠기는 시련 이겨내며 버틴 갯쑥부쟁이는 곱다 못해 금방 날갯짓이라도 할 것만 같다. 오히려 공작초라 여겨진다.

갯쑥부쟁이

이파리는 무가 아닌 동그란 무가 듬성듬성 뽑힌 채 뒹굴고 있다. 상품성이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녀석 하나를 뽑아 보았더니 뿌리는 배추고 줄기는 무다. 이게 뭘까? 참 신기하게 생겼다. 손에 들고가다가 지팡이 대신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마을의 할머니를 만나 여쭤보았더니 양배추와 순무의 교배로 탄생한 콜라비무라고 했다. 이름도 모양도 다소 낯설었지만 한껏 정겨움이 묻어나는 채소였다.

콜라비

오늘은 해안도로를 걷는 게 아니라 바닷가의 선을 그리듯이 농로 혹은 바다 안의 모래사장을 따라서 그렇게 걸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똘망똘망 영특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인동은 갯내음에 취하여 계절도 망각한 채 살았나 보다.

인동

아, 이 얼마만의 만남인가? 보리 익을 즘 혓바닥이 새카매지도록 따먹던 상동나무 열매가 봄을 기다리고 있다. 어느새 난 저만치의 떠나버린 과거를 거닐면서 패랭이에 시커먼 열매 따 담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보리는 이제 막 싹을 내밀었는데 패고 익을 날까지 어떻게 견디려나 걱정이 앞선다.

상동나무 열매

빨래터에도 햇살은 계절보다 먼저 달려왔다. 아낙의 손끝에서 겨우내 엉긴 시름을 헹구고 있다.

빨래터

모슬포항, 포구 머리에 뒹구는 멸치를 먹으려고 갈매기떼 오간다. 한쪽에서는 소금에 멸치를 버무리며 젓갈을 담그고 옆에선 멸치를 널고 있다.

멸치 말리기

갈매기떼 어느 한 마리 빼놓을 수 없이 통통한 걸 보면, 올해의 항구는 풍년이었나 보다.

갈매기

이들은 신혼여행 중일까? 멀리서 보이는 두루미가 쌍쌍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니, 풍경에 취해 넋을 놓고 있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두루미

가고 오는 건 자연의 순리이련만, 바다를 걷다가 만난 갈매기의 쓸쓸한 죽음에 괜히 내 가슴이 시렸다.

쓸쓸히 죽어간 갈매기

갈매기 한 마리 죽었거나 말거나 겨우내 불질하며 버티어 온 돌가시나무 이파리 붉디붉고, 해안가 따라 하나 둘 꽃은 피어난다.

돌가시나무 이파리
갯무
별꽃
괭이밥

끝없이 펼쳐진 순비기 모래사장, 언젠가 향이 좋아서 남편의 차에 놓으려고 순비기 열매를 한 줌 땄던 적이 있다. 모든 걸 다 잊고 따기 시작했다. 언제나 나를 배려해주는 남편에게 베개를 만들어 줄 참이다.

순비기 열매

송악산이 보인다. 모래 위를 걷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다. 푹푹 빠진 발을 들라치면 종아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은 누군가 뒤에서 내 발목을 잡는 것만 같았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저 산을 타고 오르기로 했다.

멀리서 바라본 송악산

가장 멋스러움이 드러나는 해안 절벽의 해국이다. 꿈이었던가, 지난가을에 그토록 그렸건만 만나지 못했던 해국을 기어코 만났다. 사암 절벽에서 당당한 여유를 허리에 차고 지금까지 앉아있는 저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암 절벽의 해국

그 배짱에 반한 것일까? 사모하는 마음을 있는 힘 다하여 던져도 해국이 있는 데까지는 닿지 않는가보다. 아니다, 어쩌면 나란히 앉은 모습을 질투하는 파도가 대극의 외침을 삼켜버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극의 마음은 더더욱 붉어만 간다.

붉은대극

아무도 걷지 않은 길, 걸어갔어도 이미 흔적이 없어지는 마술 같은 모슬포 바다를 걷노라니 전생체험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몽롱함이 나를 휘감았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모래사장의 사암

이들은 뭘까? 작은 힘을 모아 저 바위를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바위에 붙은 작은 고동

모슬포 바다의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칡넝쿨을 움켜쥐고 송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허리엔 간간이 염소의 발자국이 보였고 스펀지라도 밟는 듯 푹신한 느낌이 좋았다. 비록 짧은 거리였지만, 헉헉거리며 암벽 사이의 풀 포기가 자일인양 붙잡고 에베레스트를 산행하는 기분으로 올랐다. 뒤돌아보니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 아찔했다. 송악산을 가로질러 내려선 길에 보이는 형제섬이 유독 다정하게 보였다. 집에 있을 땐 사소한 것 하나에도 토닥거리던 녀석들이 군에 가더니 동생을 염려하고 형을 그리는 나의 아들 훈이와 엽이가 이마를 맞대고 노는 것 같다. 내일 아침이면 저 섬 사이로 붉은 해는 떠오르겠지, 언제나 희망을 품으라는 상징을 가득 안고서 말이다. 잠자리에 드는 내 가슴에도 붉디붉은 태양 하나 가득히 품어본다.

2월의 첫날, 제주의 바닷가를 발바닥으로 그리며 같이하여주신 동료분께 감사드립니다.

주) 가마우지, 두루미, 그 외 식물의 이름도 틀릴 수 있습니다.

<제주의소리>

<고봉선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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