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마을 이야기 2] 조정에 진상할 귤이 재배되던 마을

▲ 위미마을 김상헌은 정의현 13개 처소에 병선을 정박시킬만한 포구가 있다고 했는데, 그중 한 곳이 위미포였다. ⓒ 장태욱 위미포구

실비 속 쉬지 않고 두루마리 풀리듯 밀려오는 저 물결
벼랑 넘어와 일렁대는 저 소리
벼랑 끝에 한 줄로 매달려 턱걸이하고 있는 섬쥐똥나무들
말 목 곡선으로 멋지게 흰 해안도로에 뛰어들진 못하고
얼굴만 내밀고 있다
채 정돈 안 된 도시, 그래 더 정다운 서귀포 떠나
태평양 끼고 남원 가는 길
물결소리 마음대로 들락거리게 창 열고 천천히 달리며
길 금세 끝나지 않기를 빌며
후둑이는 빗방울 목덜미에 맞는 마음 어둡지 않다
다시 올 때는 차도 유리창도 목덜미도 없이
물결로 오리.
태평양 벗어나 지귀도에서
속 쓰린 물새들과 한뎃잠 한번 자고
말 목 곡선으로 멋지게 휜 해안도로에 오르기 전
평생 턱거리로 매달려 있는 나무 엉덩이들을
한번씩 힘껏 떠밀어주리
고개 끄덕이며 내려다보는 나무들 ,
머리를 타고 넘어가라!
타고 넘긴?
머리들 사이에 머리 하나 더 끼운다
해안도로에 젖은 사람 하나 가고 있다
서귀에 왔다 간다

           -황동규의 시 <서귀포를 뜨며>  
   

▲ 지귀도 멀리 바다너머 보이는 섬이 지귀도이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섬인데, 위미리 산1번지로 등록되어 있다. ⓒ 장태욱 지귀도

시는 화자가 해안도로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푸른 파도, 물새 등과 더불어 자유를 만끽하고자하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시인이 ‘물새들과 한뎃잠 한번 자고’ 싶다는 지귀도는 위미마을에 산 1번지로 등록된 무인도다. 위미마을은 시에 그려지는 여정대로 서귀포시내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남원을  향해 가는 도중 나오는 마을이다. 위미마을과 남원마을은 서로 인접해있다.

위미마을의 설촌 연대나 유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옛 기록 중에서 당시의 마을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남아있다.

▲ 마을 표석 마을 서쪽 입구에 세워져 있다. ⓒ 장태욱 위미마을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를 다녀간 청음 김상헌은 당시 제주의 풍토, 주민들의 생활, 목민관들의 치정, 제주의 방호시설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남사록(南槎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남사록>에는 “정의현에 병선을 정박시킬 만한 포구가 13개처”인데, 그중 한 개소로 우미포(又尾浦)를 들고 있다. 우미가 위미의 옛 지명임을 감안하면, 청음이 제주를 다녀갈 당시 이곳에 마을이 있었고, 포구를 근거로 사람이 생활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청음은 “정의현 내 5면을 합해서 호구가 383호”이고, “성산에서 서귀까지 1백여 리인데, 거의 사람이 살지 않고 거친 띠풀이 들에 널려 있어 눈 닿는데까지 끝이 없고, 가끔 말떼들이 무리를 이룬 것이 보이어 수백 필에 이르는데, 모두 국마다”고 했다. 이런 기록에 미루어보면, 당시 이 일대 마을들의 규모는 매우 초라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각 문중에 보관되어 있는 족보나 비문들을 근거로 짐작해 보면, 위미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4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가장 먼저 이 마을에 살았던 주민은 상위미에 터를 잡고 살았던 고좌수라는 사람이라는데, 마을에는 그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고좌수는 상당한 재력가였는데, 그 위세가 대단하여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억지로 일을 시키는 일이 다반사였어도 사람들이 거절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부인은 지관의 지시대로 묘를 써서 장사를 지냈는데, 아들들이 갑자기 힘이 강해져서 당할 자가 없어졌다. 힘을 주체하지 못한 아들들은 이웃들에게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행패를 부렸다. 나중에 아들들이 역모 죄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그 가문은 패가망신했다고 한다.

▲ 귤과 한라산 귤은 위미마을 어디에서든지 쉽게 볼수 있다.ⓒ 장태욱 위미 귤
 
제주에는 삼국시대부터 귤이 재배되어 조정에 진상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과원이 체계적으로 조성되어 관리되었다. 중종 21년(1526)에 이수동 목사가 도내 다섯 군데의 방호소에 관원을 설치하여 감귤을 옮겨 심은 후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한 이후로 도내 과원수는 점점 증가했다.

이원진 목사가 기록한 <탐라지>에 따르면 17세기 도내에 설치된 과원은 제주목에 23개소, 정의현에 8개소, 대정현에 6개소였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기존의 과원이 폐원되고 새로운 과원이 신설되기를 반복하면서, 19세기에는 총 과원수가 54개소에 이르렀다.

정의현의 경우는 17세기에 있었던 과원 정자 독학 별과원 우전 금물 향목 원통 성산 등의 과원 중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원통과 우전뿐이었고, 나머지 과원들은 모두 폐원되었다. 그 대신 새로운 과원들이 조성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위미원이었다. 박영후가 발간한 <제주도지>에는 위미원은 정의현 서쪽 55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에 전해지기로, 위미원은 지금의 위미교회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정의현에 재배되던 귤이 대부분 산귤과 유자였음을 감안해보면, 당시 위미원에도 이들 품목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말기에 접어들자 조정의 진상 독려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몰래 귤나무를 고사시키거나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감소시키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했다. 감귤진상이 주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조선의 지배체제가 문란해지면서 도내 과원들은 하나둘씩 쇠퇴해가기 시작했다. 위미원도 조선말기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한라봉 온실 안에서 한라봉이 자라는 모습니다. 조생귤과 더불어 농민들의 삶을 지켜주는 작물이다. ⓒ 장태욱 한라봉
 
지금도 위미마을에는 어디를 가나 조생온주나 한라봉 등의 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재배되는 이런 귤들은 대부분 해방이후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귤들로, 조선시대에 도내에서 재배되었던 재래종 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다.

1960년대 마을에 조생온주가 도입된 이후 위미는 도내 귤의 주산지로 떠올랐고, 이를 기반으로 한때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농촌마을로 꼽히기도 했다. 물론 이런 부유한 생활은 외환위기가 불어 닥치기 이전의 이야기다. 외환위기 이후 귤의 가격하락으로 농가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마을이 맺어준 인연대로 귤에 의지한 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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