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1-1 강철중 (하)

그니깐 '영리가정'을 만들어야 한다나 뭐래나. 경제난이 심해지는 이 시대. 가정도 스스로 자본유치해야 한다면서 영리가정으로 변해야 한답디다. 나 원참. 그 대책이 뭔지 아우?...

일단 곶자왈 지대에 집을 옮겨야 한대. 곶자왈 지대도 '개가시나무'가 서식하는 곳이면 더욱 좋다나 뭐래나. 그런 후 60m 이상 높이 되는 곳에서 살아야 한대요. 그러면서 양배추를 주로 먹으면서 영어를 해야 한답디다.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물었잖수. 아니 곶자왈 지대에 60m 이상 높이 되는 곳이 어디냐. 있대!. 곶자왈 지대에 있는 60m 이상의 오름이면 된다는 거야. 어쨌든 요즘 트랜드가 곶자왈 지대에 높은 건물에 있는 곳이면 일단 자본이 유치될거래. 그래야 가정도 자본을 유치하는 '영리가정'이 된다나 뭐래나. 얼마나 웃긴 일이우?. 여튼, 여담은 여기까지 하고...

철중 형님이 거성그룹의 보스 '이원술'을 공격한 것은 곧 민주주의가 거세된 전체주의 권력에 개인이 대항한 것이라고 보여지우. 이미 이 때부터 관객들은 쾌감을 얻기 시작했고.

그 쾌감을 통해 관객들은 공권력의 환멸을 확인했다고 생각하우. 왜냐?.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이 커진 상태에서 형님같은 돌연변이가 나타나서, 그것도 공권력 기관에 종사하는 분이 거대한 전체주의 조직을 상대를 쳐부수겠다고 나서니 쾌감이 없을 수 있겠냐 말이우.

쾌감과 별도로 상대적으로 주목해야할 대상이 있수. 바로 사건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17세 고등학생. 그 고등학생은 거성그룹에서 활동하다 조직을 위해 희생양이 될 뻔하죠. 고등학생은 희생양이 되는 댓가로 후일 조직의 중요한 자리를 주겠다라는 이원술의 발언을  핸드폰으로 미리 찍어놓았지요. 다행이 형님은 고등학생으로 인해 이원술을 잡을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고.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그 고등학생이 몰래 촬영을 하게 된 의도인데, 무슨 정의를 위해서 이원술과 대화장면을 미리 촬영했을까?. 아니라고 생각하우. 권력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기민한 판단감각이 작용했다라고 볼 수 밖에 없수.

자, 그 고등학생이 이원술과 대화장면을 몰래 촬영한 시간은 경찰에게 잡히기 전이우. 경찰이 미리 고등학생과 합의해서 성사하지 않은 거지. 고등학생 스스로 판단하고 미리 촬영해 놓았던 거지. 왜?. 조직이 말을 바꿔 자신을 용도폐기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면죄부 즉, 다른 권력에 보호를 받을 자원이 필요했던 거지. 결국 그 판단은 적중했고 의도가 어떻든 그 촬영물은 공공의 적을 잡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시스템에서 서민들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합의나 약속보다 권력의 흥망여부 및 이동관계를 놓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판단할 수 밖에 없수.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미리 권력의 이동에 대비해야 한다는 쓸쓸한 이 시대 풍경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거지. 결국 중요한 건 자원을 어떻게 끌어들이고 활용할 줄 아느냐. 다른 사람에 비해 경쟁적으로 자원을 제대로 확보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이 시대, 특히 권력 이동관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형님에게 궁금한 건 왜 증거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굳이 마지막에 주먹다짐으로 한판 뜨면서 처벌을 해야 했냐라는 거지.

정상적인 상황의 경찰이라면 이미 증거물을 가졌으면 그걸로 끝 아니우?. 증거물 갖고 절차대로 범죄자를 검거하면 되잖아. 하지만 증거물을 가진 상태에서 이원술과 주먹다짐을 통해서 끝장을 본다 말이우. 주먹다짐은 이원술 개인에게 갖는 울분을 해소하자는 것밖에 안되는데.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을 보게 됐수. 이원술의 변호사가 수갑에 묶인 채 차 안에 앉아 있고 형님과 이원술이 부두에서 한판 크게 벌이는 장면이우. 변호사가 상징하는 법과 원칙을 수갑에 묶어 놓고, 폭력 대 폭력으로 공공의 적을 끝장내겠다는 의지. 민주적인 절차나 법과 원칙을 무시해서라도 폭력으로 전체주의 권력을 끝장내겠다는 판타지.

결국 형님의 정권타파는 성공하잖수?. 증거가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숨겨놓고 폭력으로 울분을 풀어야 했던 정권타파. 그 정권타파 과정은 영화의 가장 클라이맥스 장면이었고 관객들의 쾌감을 절정으로 올려놓은 장면이었수.

▲ 이영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아마 이 시대 관객, 서민들은 이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서민들은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정권을 교체했지만 권력을 이양받은 정권이나 도정이 전체주의 시스템으로 통제하려 할 때, 서민들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고 결국 법과 원칙을 무시한 어떤 거대한 힘으로 이 시대 정권과 도정을 징벌하려는 판타지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전체주의로 흐르는 시대 상황과 서민들의 불안감과 판타지를 우리네 권력자들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건가. 결국 민주주의가 죽고 남는 건 폭력에 의한 경쟁일 뿐일텐데. 불안감은 어쩔 수 없수. 그리고 흘러가는 모양새가 꼭 불안감이 현실로 닥칠 거 같고. 아마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도 같고.

형님 생각은 어떻수. 영화는 영화일 뿐일까?. 그런데 강철중 형님에게 향하는 환호가 너무 컸단 말야. 흠... <제주의소리>

<이영윤 객원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 이 글은 (사)제주대안연구공동체 '주간제주동향'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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