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들(55)

▲ 털머위.ⓒ김민수

올 겨울은 유난히 바람이 많아서 여느 해 겨울보다 추웠습니다. 한 달 가까이 햇살다운 햇살도 보질 못하고 쌩쌩 부는 겨울 바람에 덜덜 떨어야만 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한 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끼면서 지내고 있는 겨울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추위를 뒤로하고 피어나는 꽃들이 있으니 그들을 보면서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돌아보기도 하고, 꽃이 귀한 계절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면서 불평을 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래, 이렇게 추운 겨울에도 꿋꿋하게 못 피웠던 자신을 피어내고, 마른 가지에서 또다시 꽃을 피우는 것들이 있는데 열심히 살아야지.'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잡는 일은 그들에게서 희망을 줍는 순간들입니다.

▲ 토끼풀.ⓒ김민수

마치 겨울들판 한 구석에 봄이 온 것만 같습니다.
어느 봄의 들판이 아니라 엄연한 겨울의 들판 한 쪽에 무성하게 자란 토끼풀들을 보면서 어떤 연유로 그 곳만 그렇게 초록빛으로 치장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을 보면서 봄이 멀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봄이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풍경 그 어딘가를 한 조각씩 초록빛으로 물들여가면서 오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한 조각씩 물들여가다 퍼즐그림이 완성되듯이 "봄이다!"그렇게 소리칠 수 있는 날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저 토끼풀 어디에는 찬찬히 둘러보면 네잎크로버도 있을 터인데 그렇게 앉아서 네잎크로버를 찾기엔 너무 추운 날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넉넉하게 피어있습니다.

▲ 매화.ⓒ김민수

봄의 전령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 '설중매'라고도 부르는 꽃, 사군자중에서도 가장 먼저 불리는 꽃이니 매화가 피면 봄이 멀리 있지 않은 증거입니다.

어제는 겨울비가 내렸습니다.
그 겨울비를 속내에 담아 피어났는지 꽃잎도 촉촉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의 피고 지는 모습은 아주 느려서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와!'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힘을 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 수선화.ⓒ김민수

가을이 가고 겨울이 시작되는 계절에 피어나기 시작했던 수선화는 따스한 봄의 기운을 다 맞이하지 못하고 가는 겨울 꽃입니다. 올 겨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금잔옥대'가 무색할 정도로 꽃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에 머물지 않고 늘 새롭게 피어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가곤 합니다.

사람들은 상처를 받으면 많이 아파합니다.
아파하다가 절망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아무리 아파도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들을 내어놓는 것이 자연입니다.

수선화의 작은 금잔에는 희망이라는 술이 가득하게 담겨있는 듯 합니다.
향기는 맡을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는 희망이라는 술을 가득 담고는 희망의 땅, 자신의 어머니 대지를 바라봅니다

▲ 장미.ⓒ김민수

5월의 여왕인 장미도 한 겨울 추위에 잔뜩 상기된 붉은 이파리들과 함께 피어났습니다.
겨울바람이 불던 날 작은 꽃 몽우리를 보았지만 이 추위에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그냥 얼어붙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잔뜩 흐린 날들 속에서도 간간이 비치는 햇살들을 하나 둘 모아 꽃을 피워내고야 말았습니다.

어쩌면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5월과 비교할 수 조차 없는 계절에 피어났으니 '바보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요, 바보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것이 그냥 '바보꽃'이 아니라 세상을 살되 바보로 살아가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너무 사람들이 영악하게, 계산적으로 살아가니 세상도 참 살 맛이 안 나게 되었으니 바보가 되어서 세상 살 맛나게 하라고 하는 듯 합니다.

▲ 동백.ⓒ김민수

겨울 꽃 동백은 제철에 피어난 꽃입니다.
겨우내 그 붉은 빛으로 피어났다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낙화하는 동백꽃을 보면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는 개인적으로 죽음 앞에 서있는 이들, 죽음과 만난 이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어도 그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고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그 순간이 언제이든지 너는 저렇게 동백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동백이 그렇게 묻는 듯 합니다.
한 겨울에 피어있는 꽃들, 그들은 그저 피어난 꽃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그들 속에 들어있는 희망이라는 작은 조각들을 나눠주려고 피어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겨울도 그 꽃들로 인해 한 걸음 물러날 것만 같습니다. 그 한 걸음만큼 봄도 올 테죠.

※ 김민수님은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것을 즐겨 합니다. 자연산문집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 '을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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