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마을1] 법화사, 존자암, 법정사, 왕자묘를 품은 하원마을

▲ 구산망 정상에서 바라본 하원마을의 모습이다. ⓒ 장태욱

서귀포시 중문동은 아름다운 해수욕장, 주상절리대, 천제연폭포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정상회담이 개최될 때마다 외국의 정상들이 이곳에서 머물다가면서 중문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중문관광단지와 인접해있고 과거 탐라 문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 있다. 중문동에 속해있는 하원마을이다.     

서귀포 신시가지 강창학 구장에서 서쪽으로 연결된 산서로(1136번)를 따라 5km정도 간 지점에 이르면 '법화사'라는 사찰이 보인다. 오래전 이 곳에 있었던 법화사라는 절을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까지 법화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하원마을의 역사는 이 사찰과 더불어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 법화사 입구에 장보고 장군의 동상이 보인다. 사찰의 이름이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에 세웠던 사찰의 것과 같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장태욱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에 만들었다는 법화사와 이름이 같기 때문에 이 사찰도 장보고 장군이 만들었다는 주장이 한 때 제기되기도 했었다. 때문에 지금도 법화사 입구에서는 장보고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찰을 복원할 당시 이 사찰을 장보고 장군과 연관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품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루어진 법화사지 발굴 과정에서는 이 절이 1270년대 전후로 중창되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곳에 절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흔적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도 13세기 이전에는 조그만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법화사는 도내 다른 사찰들과 더불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1914년에 다시 복원되었고, 최근 들어 옛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크게 중창되었다.

▲ 하원마을의 역사는 법화사와 더불어 시작했다. 과거 이 인근에는 법화원이 있어서 행인들에게 숙박을 제공했다. ⓒ 장태욱

하원마을의 옛 이름은 오롬골 혹은 악동(岳洞)이었다고 하는데, 주변에 오름이 있어서 붙여 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18세기에 들어서자 마을을 '알원' 혹은 '하원(下院)'이라고 불렀다. 과거 법화사 인근에는 행인들이 머무는 숙박시설인 원(院)이 있었는데, 마을이 원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원(下院)이라는 이름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 되다가 하원(河源)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주위에 법화수(法華水), 원두수(源頭水), 통물, 큰이물, 개상골 등 샘이 많다고 해서 '내의 근원'이란 의미로 개칭한 것이다. 

한편, 하원마을은 영실계곡이 소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실은 1100도로 정상 동쪽에 위치하며, 성판악, 어리목, 관음사와 더불어 한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주요 진입로 중 한 곳이다. 영실에는 오백나한 혹은 오백장군 등으로 불리는 기암들이 병풍 같은 자태로 한라산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 뒤에 보이는 바위들이 오백장군동이다. 영실계곡은 한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주요 등반로 중 하나다. 하원마을 산 1번지에 해당한다. ⓒ 장태욱

영실계곡 인근에는 해발 1374미터 높이의 볼래오름이 있는데, 이 오름의 남동쪽에는 존자암터가 있다. 지금도 이절이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직후(기원전 540년경)에 지어졌으며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고려대장경 법주기에 '발타라존자의 탐몰라주 불법전파(발타라존자가 탐몰라로 가서 불법을 전파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발타라존자는 석가모니의 여섯 번째 제자의 이름인데, '탐몰라'를 '탐라'로 해석한다면 존자암은 한국불교의 최초 사찰이 되는 것이다.

홍유손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무오사화에 연관되어 1498년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 중에 존자암이 퇴락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찰을 보수할 것을 권하는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을 남겼는데, 다음은 그중 일부다.

지금 이 존자암은 제주도에 세 성(姓)이 처음 일어날 때 창건되어 세 읍이 정립한 뒤에까지 오랫동안 전해왔으니, 비보소(裨補所)이자 세상에 이름이 난지 오래다. 정의현 대족들이 악질에 많이 걸린 것이 이 암자를 폐한 뒤부터이고, 비바람이 때때로 어긋나 흉년이 드는 것도 이 암자를 중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민가의 호족과 관과의 관원으로부터 논밭을 가는 사내와 물을 긷는 아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늙은이와 초동, 목동들까지도 모두 달려와 이 절을 중수하고자 하소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홍유손도 이 존자암이 제주에 고양부 3성이 나올 때 이미 세워 질 정도로 이름이 난지 오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존자암터를 발굴한 결과, 존자암터에서 고려시대를 넘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 절이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이곳에 사찰이 새롭게 복원되어 불자들을 맞고 있다.

▲ 영실 인근, 볼래오름에 존자암 터가 있다. 이 곳에 새롭게 존자암이 복원되었다. ⓒ 장태욱

법화사, 존자암과 더불어 하원에 빼어놓을 수 없는 사찰이 있다. 1918년 항일투쟁의 근거지였던 법정사가 그것이다.

'법정사 항일투쟁'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8년 10월 6일에 400여 명이 주민들이 중문주재소를 습격했던 사건을 말한다. 당시 주민들은 법정사의 주지였던 김연일의 지휘아래 호미와 낫 등을 들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 건물을 파괴했다. 당시 거사에 참여한 주민들은 결국 경찰에 진압되었고, 주동자를 포함한 66명이 검거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과거 법정사가 있던 오름을 지금도 법정악 혹은 법쟁이라 부르는데, 법정악에는 법정사 항일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복원공사가 한참 진행 중에 있다.

법화사의 동쪽 2km 쯤 거리에 이르면 '탐라왕자묘'라는 안내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 표지가 서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가면 제주의 무덤양식과는 그 모양이 확연히 다른 무덤 3기가 있다.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무덤을 '왕자묘'라고 불렀다.

▲ 하원마을에는 주민들이 '왕자묘'라 부르는 무덤 3기가 있다. 묘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장태욱

이 무덤이 누구의 묘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무덤을 왕자묘라고 부르게 된 사연도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는 이 무덤이 탐라 후기 지배층의 무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무덤의 외관이 고려식 무덤인 김녕마을 광산김씨 입도조묘와 비슷하다. 그리고 고려는 탐라를 복속시킨 이후에도 탐라 지배세력에게 성주, 왕자 등의 지위를 유지하게 했고, 고려의 무관벼슬을 제수하여 해상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로 미루어 볼 때, 이 무덤은 당시 탐라 지배층이 고려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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