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이 만난 사람(9)] 현기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 29일 김재윤 의원이 주관한 생태문화여행 첫 프로그램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현기영 원장.
현기영(玄基榮) 선생(41년 생), 이제는 제주도민 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분. 네이버 인물 프로필에는 그에 대한 평가를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문화적 전략'이라고 묘사하여 눈길을 끈다. 또한 동 홈페이지 백과사전 인물란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현기영 선생은) 제주도의 역사적 사건을 작품소재로 삼아 문학을 통해 민중의 역사를 재조명함으로써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제주 출신 소설가이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아버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78년 제주도 4·3사건을 작품화한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함으로써, 제주도의 민중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문제작가로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작품으로 필화사건을 겪는 등 개인적 고통이 따르기도 했다. 이어 4·3사건을 문학적 화두로 삼아《아스팔트》(1984)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역사적 수난기에 처한 제주민중의 삶을 치밀하게 탐색해 '4·3 작가'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문학적 활동과 함께 제주 4·3연구소 소장과 제주사회문제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꾸준히 4·3 관련 활동을 펼쳐 왔다.1980년대에 들어서도 제주도의 역사적 삶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어 제주도에서 발생한 방성칠의 난(1898)과 이재수의 난(1901)을 다룬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1981~1982)를 연재해 1980년대의 중요한 역사소설로 평가받았다... 이어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한 인간의 꿈이 역사의 힘 앞에서 무참히 좌절되는 단편 《마지막 테우리》(1994)와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발표해 1990년대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등단 이후 줄곧 제주도의 민중사를 작품화함으로써 민족문학작가로 평가받는 현기영은 1980년대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관계해 오다가 2001년 3월부터 이문구(李文求)의 뒤를 이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주요문학상으로 만해문학상(1989), 오영수문학상(1994), 한국일보문학상(1999)등을 수상했다."

▲ 한국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제주출신 현기영 원장.
이런 그가 지난 2003년 2월 17일, 제11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취임했다. 고교 교사를 제외하고는 공직 경험이 거의 없는 그다. 하여 주변에서는 현선생이 우리나라의 문예정책을 총괄하는 원장직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던 게 사실이다.

취임한 지 2년이 다되고 있는 지난 23일, '제주도의 자존심' 현기영 선생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국회 김재윤의원실이 주관한 '제주생태문화여행' 첫째 날 행사에서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 주변 참가자들의 눈총(?)을 받으며, 식당 한구석에서 선생님과 함께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태기행이라 그런지 검정 점퍼 안에 하얀 추리닝을 입으셨다. 완전 전투복 차림인 셈이다. 이제는 눈썹까지 하얀 백발로 변해버린 선생님의 모습과 오히려 잘 어울린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신지요. 문예진흥원장에 취임하신 지 얼마나 되셨죠?

"2년쯤 됐나? 2년 전 2월 17일자로 취임했으니 그 정도 됐을 꺼야. 그 만큼 주름살도 늘었지(웃음).

- 벌써 그렇게 됐나요? 엊그제 같은데. 그나저나 글만 쓰셨던 선생님, 자유인이셨던 선생님이 문예진흥원장이라는 관료직(?)을 맡으면서 주변에서는 그 직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선생님 또한 상당한 부담이었을 텐데요. 이제는 적응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문예진흥원장이라는 직은 관료라기 보단 '문예CEO'에 가까워. 원장이 되니 글도 못 쓰고 책도 못 읽고, 마인드와 머리가 '문화정책' 쪽으로만 바뀌고 집중되어 부담스러웠어. 또한 문예진흥원장은 예술의 각 장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문학 쪽 외에는 다른 분야는 잘 몰라 여러 장르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어. 그리고 취임 초기부터 '문예진흥원'을 '문화예술위원회'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야당과 예술계 일각 그리고 일부 언론의 반대에 부딪쳐 힘들었던 적이 기억나. 그 때는 이유도 없이 반대하더라구. 그 때문에 고생했어. 이젠 법안도 여야 합의로 통과됐고, 여야의원 모두 협조를 잘 해주어서 문제가 없지만..."

- 제일 궁금한 질문입니다. 예전에는 참 약주를 좋아 하셨는데, 어떠신지요? 요즘도 그렇게 잘(?) 드시는지...

"예전에는 7시간 이상 술을 먹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다음날 아침 출근해야 하니 많이 못 먹지(웃음)"

▲ 현기영 원장은 환경파괴는 생명을 살육하는 것으로 평화의 섬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 이번 '생태관광' 행사에 참여하신 이유는?

"솔직히 말해 오랜만에 제주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육지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시각으로 함께 내 고향의 자연을 보고 싶었어."

- 최근 보도에 따르면 문화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민간 협의체 성격의 '재단법인' 문화예술위원회로 8월경에 탈바꿈한다고 하는데요. 이런 변화를 추진한 배경을 말씀해 주시지요.

(문화부는 27일 이런 내용을 뼈대로 하는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29일 국회를 통과한 뒤 이날 정식으로 공포되었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문예진흥원을 폐지하고 문화예술 지원의 정책 결정·집행 권한을 새로 구성할 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법안은 공포 뒤 6달이 지난 7월28일부터 시행되는데, 문화부는 시행 전까지 문화예술위원회 설립준비단을 꾸려 하위 법령과 위원회 정관, 각종 규정을 입안할 예정이다. 위원·위원장 선정 등 법인설립 절차는 7월27일까지 끝나며 이후 한달 안에 법인 등기 절차를 마쳐야 한다. 따라서 늦어도 8월 중순까지는 위원회가 공식 출범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계 인사들은 위원회 전환을 대체로 반기고 있으나 위원 선임 과정에서 진보·보수 계열 문화계 인사와 관련 단체들 사이에 배분을 둘러싼 진통이 예상된다. 또 문화부 장관의 고유권한으로 규정한 위원 최종 위촉권과 사업계획·예산 승인권에 대한 폐지 논란도 이어질 전망이다)

"그 동안 오랜 동안 문화예술 행정이 정체돼 왔다는 지적을 받아 왔어. 그래서 이의 대안으로 뜻 있는 문화예술활동가들은 3∼4년 전부터 '위원회' 체제를 주장해 왔고, 문예진흥원 자체적으로도 심포지엄 등 통해 의견수렴을 해 왔어. 그 결과 타당성 있다는 결론이 나 추진하게 된 거야. 문예진흥원은 관료조직과 비슷해. 직원도 관료화되고... 그래서 문예진흥기금을 지원할 때도 욕 안 먹으려고 건수만 많이 만드는 식이었어. 이른바 '소액다건주의식 지원'이지. 이러니 예술이 살수가 없는 거야. 예술도 엘리트로, 좋은 예술로 키워야 하는데, 산술적인 배분방식 택했으니, 창의적이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말이야. 이것을 타파, 혁신해서 제대로 된 배분을 하려면 '위원회' 체제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된 거야. 민간 예술인도 같이 참여하여 의논하고 적재적소에 시의적절하게 배분하도록 하자는 것이 그 주요한 취지라 할 수 있어. 다시 말해 '관료적 문예지원 시스템'을 '문예적, 창의적 배분 시스템'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보면 될 꺼야."

- 위원회 체제로 굳이 바뀌지 않아도 선생님께서 원장이 되신 후에 문예진흥원의 지원방식이 많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집중지원 제도가 확대되고 일반공모사업 지원이 대폭 확대되지 않았나요? 그래서 문예진흥원이 예년에 비해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였다고 밝혔다고 평가되고 있기도 하는데요.

"나름대로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기 위해 노력했는데, 기존에는 진보적 장르나 새로운 예술장르에 대해서는 도외시해 왔어. 그래서 나는 진보적 예술 분야나 그 동안 소외돼 왔던 분야, 그리고 실험적 예술 분야에 대해 상대적으로 지원 폭을 넓혔어. 내가 문학분야 소속돼 있어 문학분야에 기금 지원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이 분야가 소외돼 온 게 사실이어서 기존 타 분야에 지원되던 기금을 축소시키고 문학분야에 기금 지원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기금을 신규로 증액해서 지원을 확대했어. 어쨌든 원장이 아무리 공평하게 배분하려고 해도 다른 분야는 잘 모르기 때문에 각 분야를 세심하고 세세하게 파악 못한다는 한계가 있지. 그래서 원장의 취향에 따라 부당하게 소외되는 예술분야가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위원회 체제가 필요한 거야."

▲ 현기영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지훈 제주의 소리 상임이사
- 문화예술위원회로 바뀌게 되면 원장 직을 물러나게 되십니까? 아니면 위원회 활동으로 이어지시나요. 그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잡고 계십니까?

"내 의지대로 이런 저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것만은 얘기하고 싶어. 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고 온 사람이야. 빨리 시스템만 새롭게 구축되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선배들의 경우를 보니 앞으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10년 정도 밖에 안 남았더라고. 6개월 후에는 본연의 문학인으로 돌아가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감출 수는 없어. 그러나 그것도 내 의지대로 될 지는 미지수지"

- 선생님께서는 원장직에 취임하시면서 저에게 원장직을 그만 두면 제주에 오신다고 했는데, 그럼 제주에 내려오신다는 말인지요.

"정말 내려오고 싶은데, 당장은 힘들 것 같아. 아까 말했지만 내가 활동할 수(글을 쓸수 있는)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 제주에 내려오면 '사람과의 관계'에 얽혀 제대로 작업하지 못할 것 같아. 또 당장 내려올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원장직에 부임하면서 '창작과 비평'에 1회만 연재하고 글을 중단했거든. 근데 그 주제가 바로 '도시이야기'야. 장편인데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시를 주제로 한 소설이기 때문에 이것만은 마치고 내려와야 할 것 같아. 그러려면 3∼4년 정도 후가 되지 않을까?"

- 최근 제주도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평화의 섬 지정에 공로가 크다고 하여 제주도로부터 '감사패'를 받으셨는데요. 이와 관련 도민들의 기대가 큰 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너무 외형적인 면, 하드웨어 중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시죠.

"제주가 그냥 '평화의 섬'이 아니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이유는 바로 4·3이 미국의 동북아 전략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고 세계에 알리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정말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되려면 주민들도 평화로워야 해. 빈부격차도 심화되고 있으며 골이 깊어지는 양상이 제주에서도 보이고 있는데, '과연 제주가 평화로운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어."

"또한 평화의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느림'이나 '표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통수단도 도민이나 관광객을 위한 '마차'나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더 좋을 것 같아.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는 거지. 길을 뽑고 넓히는 것보단. 이것을 관광과 연결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해. 느릿느릿, 행복해 보여야 평화스러워 보이지 않겠나? 최근 한라산 110도로에 모노레일을 놓는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보다 마차를 운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환경도 마찬가지야. 생태계의 파괴는 '자연을 살육'하는 거야. 평화의 섬 운운하면서 환경을 살육하는 개발을 한다면 그것은 평화로운 섬의 모습이 아니야. 그런 거 보면 공무원들은 '노는 것이 최고로 일 잘하는' 거야. 일한다고 하면서 파괴나 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무위무사(無爲無事)'로 행정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말이지. 공무원들은 '어떻게 하면 서비스를 잘 할까'만 생각하는 것이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

   
2년전 현기영 선생님의 문예진흥원장 취임 소식과 고희범 선배의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취임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서 필자는 지방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투고 한 바 있다. 이를 요약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한 농민의 자살까지 불러 온 감귤 값 폭락에다가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인해 영 살 맛을 못 느끼던 차에, 봄소식을 알리는 듯 기쁜 소식이 겹으로 들려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사실 여유가 좀 있었으면 지방신문 광고 면이라도 사서 축하 광고를 실어 드리고 싶습니다만, 오히려 그것 자체가 님들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우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 현선생님은 주로 밤에 작업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밤새워 글을 쓰시든 술을 드시든 - 이제 낮과 밤이 바뀌는(?) 생활에 적응하시느라 좀 힘드실 거란 생각이 드네요. 넥타이도 메고 다니시는지... 공직이라곤 하지만 선생님 식대로 편한 복장으로 다니시면 좀 어떻습니까?

항상 깊고 순수한 눈빛을 갖고 계시는 동네 삼촌같은 선생님. 묻혀있던 제주 4·3을 문학의 소재로 끌어들여 공론화 시키고, 자유와 민주를 위해 독재정권과 온 몸으로 맞서 왔던 선생님. 혹자는 "공직에는 어울리지 않으시는 분"이란 평가를 하지만 그 직분 또한 선생님께 시대가 요구하는 일이라 생각하므로, 선생님의 열린 마음과 대쪽같은 품성으로 잘 해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로 인해 선생님의 귀향이 늦어지시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입니다. 지역에 "선생님 같은 원로가 한 분만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는 생각을 늘 해오면서 어서 속히 내려오시기만을 기다렸던 저이기에 그렇습니다.(중략)

서울에 계신 두 분을 생각하면 정말 자랑스럽고 흐뭇한데, 정작 제주의 현실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제주에 살고 있는 후배로서 몹시 자괴감이 듭니다. 새로운 시대, 제주도 새롭게 변해야겠지요. 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기 위해, 원칙과 상식이 살아 숨쉬는 제주공동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약하나마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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