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메꽃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오로지 바다가 전부인 양 살아가는 갯메꽃. 물 한 모금조차도 저장할 곳 없는 모래밭에서 어쩌다 바위틈이라도 만나면 다행인 듯 손을 뻗쳐 기어오른다. 해변을 거니는 이 발길에 밟혀도 아프다 한마디 못하고 성난 파도가 밀물에 실려와 광기를 부려도 외마디 비명 지를 줄도 모른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땡볕에서도 견뎌야 하는 삶은 고달프기도 하련만, 피워낸 꽃은 수줍디수줍은 처녀처럼 발그레한 얼굴에 티끌 하나 없는 해맑은 얼굴이다. 구속받지 않고 살아가는 자의 자유 표현일까? 특권이라면 특권이랄 수 있는 그 권리를 누리고 살아가자면 고통은 더러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내가 어릴 적에는 휴일이면 노상 밭에 가서 살아야 하는 게 일과였다. 지금도 이따금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밭에 가면 유독 메꽃이 많았다. 때론 곱디고운 꽃을 피운 녀석도 있곤 했지만, 어쨌든 곡식을 키우려면 이들을 처단해야만 했는데 그게 영 쉽지가 않다. 땅속줄기가 기다랗게 뻗어 있어 끝을 찾기도 어렵거니와 중간에서 뚝뚝 끊기고 마는 게 다반사다. 조금이라도 끊겨 남은 녀석은 영락없이 다시 싹이 돋아나고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며 뿌리 조금 잘린 게 무슨 대수냐고 비웃듯 쑥쑥 자란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이따금 난 어머니 따라 입에 넣고 씹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을 먹을거리로 취급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녀석의 종말을 고하는 의미에서 입에 넣고 씹었을 뿐인 것이다. 녀석의 종말을 위해 동원하는 갖은 방법 중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있다. 중산간에 살았던 나는 바다를 무척이나 동경했는데 그 동경만큼이나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해마다 백중날이 되면 어머니께선 우리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 바릇잡이를 하셨다. 손꼽아 기다리던 백중날 어머니 따라 동귀 바닷가에 가서 바위를 일구며 고동 잡는 건 대단한 낙이었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잡은 고동을 삶아놓고 바늘로 하나하나 까먹고 난 다음 껍데기는 모아두었다가 메꽃이 있는 밭에다가 뿌렸다. 그 이유 역시 녀석을 처단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는데, 메꽃이 고동 속으로 줄기를 뻗으면 더는 자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메꽃과의 여러해살이 덩굴풀인 갯메꽃은 접두사인 갯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바닷가에서 자란다. 밭에서 자라는 메꽃이 곡식을 휘감고 자라듯 모래 위를 기어가다 운 좋게 누군가를 만나면 감고 올라간다. 연정 품은 아가씨의 볼처럼 피어오르는 연분홍 꽃은 5월이 되어서야 피기 시작하는데, 난 운이 좋게도 이번의 도보여행에서 이들을 원 없이 만났다. 여기도 저기도 피어 있는 이들을 카메라에 담자니 발걸음 옮겨놓기가 무던히도 힘이 들었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해안메꽃, 산엽타완화라고도 하며, 어린싹과 땅속줄기는 식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약간의 독이 있다고 하니 섣불리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효선초근(孝扇草根)이라 하며 5-6월 개화기에 채취하여 햇볕에 말린 후 달여 먹으면 통증을 멎게 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염증을 가라앉힌다. 이 외에도 류머티스성 관절염, 인후염(咽喉炎), 기관지염 등이 치료된다고도 하는데,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런가 보다 할 뿐 약효에 대해 운운할 자격이 내겐 손톱만큼도 없다. 잎 모양이 신장을 닮았다 하여 한문이름으로는 신엽천검(腎葉天劍)이라 하며 약으로서의 효능도 신장과 관련된 것이 많다고 한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옛날 어느 장군의 수하에 한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장군이 이끄는 주력 부대와 이미 지나간 돌격 부대와의 길을 연결 해 주는 연락병 임무를 맡고 있었지요. 임무에 충실하던 어느 날, 불행하게도 이 병사는 장군의 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지키던 길목에서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답니다. 이 병사의 업무를 알고 있던 적은 교란작전으로 병사가 만들어 놓은 표지판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 까닭이 없는 장군이 갈림길에 도착하자 표지판만 있을 뿐 병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장군이 주변을 살펴보노라니 핏자국이 보입니다. 그뿐인가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나팔 모양의 꽃이 왼쪽으로 줄기를 틀고 있었습니다. 장군은 병사에게 변고가 있었음을 눈치 챘습니다. 필시 나팔 모양의 꽃도 죽은 병사의 나팔이라 여기고는 그 꽃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행군할 것을 명령하였지요. 이렇게 메꽃은 죽어서도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않는 충성스런 꽃이랍니다. 그래서일까요? 꽃말은 충성이며 그 밖에 속박, 수줍음이란 꽃말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쯤 되고 보면 갯메꽃도 우리 바다를 충실히 지키는 파수꾼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메꽃이란 학명을 모르기 전, 들에서 이들을 만나면 난 천연덕스럽게 들나팔꽃이라고 부르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나팔꽃을 닮은 게 들에 피어 있으니 들나팔꽃이라 여겼고, 당연히 바다에서 이들을 만나면 서슴없이 바다나팔꽃이라고 불렀다. 이들과 비슷한 꽃은 또 있다. 자라는 동안 늘 곁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꽃, 바로 고구마꽃이다. 가정의 주 수입원이 되었던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는 일에서부터 아버지께서 이랑을 갈고 지나면 쟁기 따라 부지런히 고구마를 주워 마대에 담아 놓으면 전분공장으로 보내졌다. 이때 나는 우연히 보았었다, 고구마꽃을. 어딘 듯 보랏빛을 살짝 지닌 나팔꽃모양. 돌연변이라도 만난 양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그 후로 다시 고구마꽃을 봤던가 싶다. 이들 모두 각기 나팔 모양을 지닌 비슷한 형태의 꽃이지만, 나팔꽃은 한자로 견우화(牽牛花)라 쓰며 메꽃은 나팔꽃보다 작고 열매는 잘 맺지 않는다고 하여 고자화(鼓子花)라고 쓴다.

▲갯메꽃 ⓒ고봉선 시민기자

갯메꽃/고봉선

갯내음 뒤엉켜
칼끝 해풍 매섭다 애처롭게 울부짖어도
사뿐히 파도를 걷어찬 갈매기
감춰둔 봄 내음 입안 가득 토해내면

갯가를 배회하던 파수꾼
집게 손 내밀어 덥석 움켜쥐고
모래 위에 소올 솔
못 미친 그리움으로 타던 갈증 하나
메꽃으로 솟아올라
하늘 향해 늘어지게 기지개 켠다

한 계절 햇살 속을 들락날락
쫑긋 세운 귓가는
푸른 빛 고동의 외침을 더듬거리며
일편단심 품은 연정 흥건히 숙성시켜
모래 위에 발그레 피워냈건만,

저 멀리 아른거리는 거대한 귀선(歸船)
두근대는 가슴 버선발에 실어
확성기에 꾸역꾸역 게워내도
허공에 발부리 채이는
뱃고동의 짙은 한숨 깊어만 가고
기다리는 님은 영영 오지 않는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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