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편지(8)] 북풍한설 몰아치는 고원의 고독한 선구자

▲ 폭설 내린 한라산의 겨울숲.ⓒ오희삼
며칠 째 폭설이 하염없이 쏟아집니다.
어렵사리 닦아놓은 겨울의 등산로가 밤새 쏟아 붓는 듯한 폭설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폭설이 멎은 오늘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푸른 설원(雪原)으로 습관처럼 길을 나섭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등산화 끈을 바짝 조이고, 스패츠로 발목을 감싸고 두터운 장갑으로 중무장하고 러쎌을 나서는 발걸음에 일렁이는 설렘과 야릇한 긴장감을 아시는지요.
전투에 나서는 장병들의 마음이 이러할까요.
겨울 숲속으로 까마귀 울음소리 반기듯이 울려 퍼집니다.

▲ 만세동산의 구상나무 숲.ⓒ오희삼

폭풍 같은 바람이 할퀴고 간 만세동산 벌판에 서니 장엄한 화구벽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장구목에서 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물결치듯 펼쳐집니다.

▲ 새벽녘 윗세오름에서 바라본 화구벽.ⓒ오희삼

파도처럼 일렁이는 설원의 끝자락으로 뭉게구름 피어나는 시퍼런 반공(半空)이 그저 묘연(渺然)하기만 하고 눈바람 속에 잠긴 겨울의 구상나무는 아득한 허허벌판을 지키는 파수꾼인양 늠름하게 서 있습니다.

▲ 한 겨울 거센 바람속에서 설의를 입고 버티어 선 구상나무.ⓒ오희삼

지난 여름 푸르고 싱그러웠던 추억을 잠재우고 서슬 퍼런 동장군의 기세에 한 치의 눌림도 없이 얼음보다 차가운 정열(情熱)을 태우듯 우뚝 선 구상나무의 침묵이 왜 이다지도 섧게만 느껴지는지, 제 몸 보다 두터운 설의(雪依)에 새겨진 애잔한 바람의 노래가 애처롭게 들리는 듯합니다.

▲ 한라산 고원의 구상나무는 겨울이 되면 온몸으로 폭풍같은 바람을 맞으며 겨울을 보낸다.ⓒ오희삼

아주 먼 옛날 혹독했던 빙하기의 깊은 터널을 관통하며 오늘까지 이어온 생명의 불씨들이 뿜어내는 광채처럼, 한겨울 폭풍 같은 칼바람 몰아치는 이 야성(野性)의 들판을 도도(陶陶)히 지켜온 나무가 바로 이 구상나무입니다.

▲ 한라산을 사람에 비유하면 가슴께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구상나무가 들어서 있다.ⓒ오희삼
성판악이나 관음사코스로 정상을 오르거나 영실이나 어리목코스로 윗세오름을 오르거나 한라산을 거슬러 오를 때, 뼛속까지 파고드는 칼바람이 불어대는 벌판에 서면 어김없이 구상나무가 반깁니다

한라산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가슴께부터 머리끝까지 대부분을 구상나무가 들어선 셈이지요.

‘아비에스 코리아나(Abies Koreana)’, ‘한국의 젓나무’란 구상나무의 학명이지요.
그렇습니다. 구상나무는 바로 한국의 나무였습니다.
끊임없는 질곡(桎梏)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면면히 생명의 씨앗을 이어온 백의민족의 저력처럼 오랜 세월 이 땅에 뿌리를 내려온 우리의 나무인 것입니다.

▲ 새의 날개를 닯은 구상나무.ⓒ오희삼
백여 년 쯤 전에 서양인들은 한라산의 구상나무 종자를 저네들 나라로 가져가서 우수한 유전형질 인자들만을 개량한 신종 구상나무를 만들어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었다지요.
이를 테면 귀중한 우리의 식물 종(種) 자원을 허가 없이 약탈해간 셈입니다.
너무나 흔해서 그 귀중함을 모르는 공기처럼, 구상나무 또한 그 가치를 발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 겨울의 구상나무는 바람의 장단에 따라 온갖 형상의 조각품으로 변한다.ⓒ오희삼

한 겨울의 구상나무는 카멜레온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의 장단에 따라 온 몸을 휘감는 설화가 온갖 형상으로 변신하지요.
그 어떤 조각가의 손끝으로도 빚어낼 수 없는 자연의 신(神) 만이 창조할 수 있는 걸작이라 할까요.
어쩌면 신(神)들의 정원에 바쳐진 자연의 진상품이 아닐는지요.
일만 팔천 신들의 고향 한라산으로 세상 모든 바람이 엉키고 엉켜 피워낸 조각품일 테지요.

▲ 겨울 구상나무는 자연의 신이 만들어내는 조각품이다.ⓒ오희삼
구상나무는 천근성(淺根性)식물입니다.
뿌리들이 땅 속 깊이 뻗지 못하고 지표면을 따라 옆으로 뻗어갑니다.
화산으로 분출된 척박한 용암대지에서 살아온 내력 때문에 생긴 버릇일 테지요.
한 겨울 온 몸을 둘러싼 천근만근 눈의 무게를 구상나무는 온몸으로 이겨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삼킬 듯한 한라산의 폭풍 같은 바람에 굴하지 않던 구상나무도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 만세동산의 구상나무 숲.ⓒ오희삼

얼어붙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다 못해 뿌리가 들썩입니다.
해빙기가 되어 온 몸을 감쌌던 눈이 녹을 무렵에는 얼었던 대지도 부풀어 오릅니다.
‘서릿발 현상’이지요.
옆으로만 뻗는 구상나무의 뿌리도 덩달아 부풀어 오르면서 잔뿌리들이 단단하던 흙에서 들려집니다. 나무는 수분공급이 끊어지게 되고 결국엔 말라죽고 말지요.

▲ 구상나무의 고사목.ⓒ오희삼

불어오는 바람에 스스로 휠 줄 모르고 강직하기만 한 구상나무는 거센 폭풍우와 타협할 줄 모르고 온몸으로 겨울을 지새우다 고사(枯死)하게 됩니다.
바로 고사목이지요.
그러나 구상나무는 죽어서 오히려 더 오래 삽니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 산다는 그 고사목이지요.
시류(時流)에 맞추어 유연하게 살아가는 삶은 주워진 삶을 편안히 살 수는 있겠지요.구상나무는 그런 삶을 단호히 거부한 선구자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벌판을 외롭게 지키다 스러져간 고독한 선구자.
시류에 굴하지 않고 강직하게 살다가, 죽어서 오히려 역사 속에 그 이름을 남기는 의로운 선비의 꿋꿋한 기상을 오늘 저 한겨울의 침묵하는 구상나무에서 그려봅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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