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제주에 온 이명박 대통령에게 바란다

▲ 한-아세안정상회담 참석차 31일 제주에 온 이명박 대통령이 행사장인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김태환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한아세안 정상회의 공동취재단.
이명박 대통령이 ‘세계 평화의 섬’에 왔다. 한-아세안 정상회담 주최국 대통령으로 어제 제주에 왔다. 지난해 6월 16일 아셈(ASEM) 재무장관회의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에 온 이후 1년 만에 다시 찾았다.

나랏님 방문은 지방으로선 대단한 경사(慶事)다. 중앙 각 부처 관심이 온통 수도권에만 쏠려 있는 상황에서,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대통령 지방방문은 산적한 과제를 일시에 내 놓고 국가원수의 결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결정적 계기다. 특히 정치권과 중앙정부에 입김이 약한 제주로서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호재다.

특히 한-아세안정삼회담이라는 국가대사와 함께 온 대통령 방문은 더욱 그렇다. 이번 회의는 2000년 아시아.유럽(ASEM) 정상회의,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정상급 회의다. 제주에서는 섬(島)이 생기고 난 후 가장 큰 행사다. 온 도민이 참여하는 큰 잔치판을 벌여야 할 판이다.

하지만 지금 제주는 너무나 차분하다. 1년 전에도 그랬다.

작년에는 촛불정국이 한창일 때 대통령이 왔다. 도민들과 대화다운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올라갔다. 올해는 이보다 더 한, 전혀 예상치 못한 전임 대통령 서거 정국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폭풍이 어떻게 몰아칠지 그야말로 ‘폭풍전야’ 상황이다. 한창 시끄러워야 할 잔칫집이 오히려 제삿집 같은 분위기가 나는 게 그 이유다.

제주도민이 답답함을 느끼는 건, 여기에 한 가지 더 있다. 이른바 ‘주민소환’ 정국이 보태졌다. 김태환 제주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한-아세안정상회담을 드러내 놓고 좋아할 분이기가 아니다.

언론인으로서 찹찹함을 느끼는 건 어제(30일)와 오늘(31일)제주에 온 한승수 국무총리와 이명박 대통령이 꺼낸 이야기 때문이다.

비단 언론인이라서가 아니라, 제주사회의 갈등의 한 복판에선 해군기지 찬반세력, 즉 공무원이나 강정마을 주민들,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오피니언그룹이라면 당연히 대통령이나 총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터였다.

제주사회 갈등이, 광역자치단체장에 대한 초유의 주민소환정국이 정부가 제주에 건설하려는 해군기지 때문임을 모르지는 않는다면, 대통령이나 총리는 제주도민사회에 얽히고설킨 응어리를 풀려는 제스처는 있어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은 당연히 그러기를 고대했다.

찬반을 떠나, 해군기지가 자치단체가 아닌 국가가 추진하는 국책사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해군기지 문제가 전임 정부에서 비롯됐고, 지금의 갈등 역시 이명박 정부 출범 이전에 야기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현 정부가 해야 할 책임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방부나 해군본부는 지금 ‘해도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해군기지 갈등을 자치단체에게만 떠넘기고 있다. 제주도정 여론조사를 통해 해군기지 후보지를 결정한 ‘한발 앞서간’ 전략적 미스가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역시 국방부와 해군본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때문이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 지난해 6월에 이어 1년만에 다시 제주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 사진=한아세안정상회담 공동취재단
해군기지를 결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국방부나 해군, 또 중앙정부는 ‘간’과 ‘쓸개’를 다 줄 것처럼 제주도민에게 매달리다가, 제주도정이 이를 덥석 물자, 마치 ‘잡은 고기에 미끼 주는 것 봤냐?’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앙정부의 국책사업을 ‘선의(善意)’로 받아들인 제주도정만 졸지에 바보가 됐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고충을 대신하려고 했던 제주도정과 해군기지 반대세력만 피 터지게 싸우는 꼴이 돼 버렸다.

찬성과 반대 여부를 떠나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지난 3년 갈등에 국방부나 해군본부 그 누구하나 제주도민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군기지 때문에 모든 생업을 놓은 강정마을 주민들에게나, 찬반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제주사회에 어떠한 형태로든 ‘사과’를 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국가방위’란 말로 모든 것을 대신하려고 했지만, 국민방위도 국민들 때문임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제주는 지금 이명박 대통령과 한승수 총리를 맞고 있다.

‘중(국방부나 해군)이 제 머리를 깍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위에 있는 국무총리나, 대통령은 제주도민의 아픔을 어루만져 줬어야 했다. 밑에 사람이 잘못한 게 있다면 윗사람이 대신하는 게 당연하다.

특히 한승수 총리는 마땅히 해야 했다. 그러나 총리 이야기는 엉뚱했다.

“강정마을회가 (한아세안 정상회의 기간 중) 시위와 집회를 자제하겠다고 한 것은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계기로 대승적 차원에서 단합했으면 좋겠다. 제주도로서도 평화의 섬으로서 평화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총리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대승적 단합에 앞서, 해군기지로 인해 상처를 받은 마을주민들에게 대승적 차원에서 ‘미안함’을 전했어야 했다. 총리는 제주도민들에게 평화를 지키는 역할을 주문하기에 앞서 평화를 지키려는 강정마을 주민들은 헤아려야 했다. 적어도 강정마을 주민의 아픔을 먼저 어루만진 후 대응적 차원의 단합과 평화의역할을 꺼내는 게 순서였다. 그게 총리의 책무다. 그리고 대통령 보다 하루 앞서 온 총리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해군참모총장이, 국방부장관이, 그리고 이제는 국무총리까지 아무 말도 안하니, 모든 화살이 대통령에게로만 가는 우스운 형국이 돼 버리지 않았는가.

31일 제주에 온 이명박 대통령이 김태환 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주민소환’ 이야기를 짤막하게 꺼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군기지 총대를 멨다가 ‘주민소환을 당한 김 지사에 대한 미안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일 수 있다.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미안함은 김 지사를 넘어 강정마을 주민, 그리고 제주도민 전체에게 하는 게 순리다. 그래야 문제가 풀린다. 난마처럼 얽힌 해군기지 해법을 내 놓는 것은 지금은 이명박 대통령의 몫이 됐다. 이 대통령이 제주에 머물 날이 1일과 2일,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는 충분하다. 강정마을 주민들의 가슴에 난 마음에 난 상처를 감싸 안아줘야 한다. 그리고 난 후 해법을 제시하고 도민들에게 떳떳하게 당부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제주에 온 ‘티’를 확실하게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게 대통령의 '힘'이 아니겠는가. <제주의소리>

<이재홍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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