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경의 일본야구 A to Z] 세이브 라이온즈 구단

사이다마 세이브 라이온즈(埼玉西武ライオンズ, さいたませいぶライオンズ、Saitama Seibu Lions)
·홈 구장 : 세이브 돔(사이다마현 도고로자와시)
·본거지: 사이다마현, 사이다마(埼玉)현은 도쿄(東京)와 북쪽에 접하고 있는 현이다. 도쿄권이라 말할수 있다. (한국의 '서울과 경기도의 관계'와 비슷)
·오너기업 : 세이브 철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철도회사)
·창단 : 1949년
·퍼시픽 리그 소속, 리그우승 21회, 일본 챔피언 13회

1949년 규슈(九州)지방 후쿠오카(福岡) 현을 중심으로 철도, 자동차 등 운송사업을 하는 니시테쓰(西鐵)가, '니시테쓰(西鐵) 라이온즈' 를 설립했다. (최초의 이름은 '니시테쓰 크립파스', 1951년부터 '니시테쓰 라이온즈')

▲ ⓒ세이브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

당시의 본거지는 규슈지방의 후쿠오카 였다. 이후 1979년 '세이브 라이온즈'가 될 때까지 30여년간 규슈지방의 유일한 야구구단으로서 또 명문구단으로서 지위를 확보했다. 또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 구단을 꺾었다.

1956년부터 1958까지 3년간 천하무적 도쿄의 '요미우리 자이안트'를 일본 시리즈에서 3번 연속 꺾고 일본 챔피언이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업적이었다. 특히 1958년 일본 시리즈는 명투수 '이나오(稻尾)'에게 '가미 사마, 호도케 사마, 이나오 사마' 라는 명언까지 붙게 했다. 이 명언은 아마도 몇 세대 동안 기억 될 것이다. 후쿠오카(福岡)는 도쿄와는 비교가 안되는 지방도시다. 이 지방도시 팀이 수도 도쿄의 요미우리 자이안트를 그것도 3년 연속이나 이겼으니 이 지방사람들은 어지간히 흥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니시테쓰 라이온스','가미 사마, 호도케 사마, 이나오 사마'를 안주삼아 한 잔하는 규슈출신 사람들이 많다.

이런 명문팀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선수들이 승부조작을 했다는 것이다. 이길수 있는 경기를 일부러 패배해 버리는 것이다. 일부러 이기는 것은 어렵지만 일부러 져주는 것은 간단하다. 이상한 제보가 들어왔다. 자기팀 선수들이 이상하게 일부러 에러를 하는 것 같다고 같은 팀 선수(외국인 선수)가 스포츠 신문에 정보를 흘려 보냈다. 조사에 들어갔다. 아닌게 아니라 선수가 일부러 에러를 내서 경기를 지게 만든 것이다.

일본은 야구도박이란 것이 있다. 야구경기에 돈을 거는 것이다. 음성적(야미)으로 하는 것이며 주로 야쿠자들이 도박판을 만들어 일반인들을 끌어들여 경기의 승부에 돈을 걸게 한다. 야쿠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승부를 만들려고 선수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것이다. 돈을 받은 선수는 야쿠자들이 시키는데로 할수 밖에 없다. 자기팀이 이기게 만들기 보다 에러를 내서 지게 만드는 것이 더 쉽다. 당연히 경찰에 발각이 되면 큰 범죄가 되는 음성 도박판을 개설하고 그것을 돕는 행위가 된다. 여기에 깊게 관계가 된 선수들은 야구장 근처도 못 오게 하는 '영구추방'을 당했다. 가장 관계가 깊었던 팀이 니시테쓰 라이온즈 였다. 이로서 관객은 뚝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오너기업 비지니스 상태도 안 좋아 1972년말부터 '이 회사가 인수한다, 저 회사가 인수한다'는 등 여기저기 굴러다니게 된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구단을 1978년말 '세이브 철도(西武鐵道)'가 인수, 1979년부터 '세이브 라이온즈'가 된다. 세이브 철도(西武鐵道)는 도쿄(東京)와 사이다마(埼玉)현을 중심으로 한 철도사업 회사다. 본거지도, 도쿄(東京) 바로 북쪽에 접해 있는, 사이다마현으로 옮겨진다.

'세이브 라이온즈'가 되면서 일약 강팀으로 일어서게 된다. 1979년이후 지금까지 약30년간 리그우승 16회, 일본 챔피언 10회를 하는 최강팀으로 바뀐다. 80년 이후 이 성적은 요미우리 자이안트를 능가하는 성적인 것이다.

이 성적을 올린 공로자가 '모리 마사아끼(森 祇晶,もり まさあき,1937年생)' 감독이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9년간  재임 기간 리그우승 8번, 일본 챔피언 6번을 해내는 명감독이 된다. 그가 감독으로 있으면서 리그 우승을 못한 것은 한 번 밖에 없었으니 항상 우승하는 감독으로 기억이 생생하다. 우승을 놓친 그 한번의 성적도 3위다. 상위 3팀이 마지막 경기까지 우승 다툼을 벌여이다 마지막 날 경기에 져서 3위에 머물렀다.

모리 감독은 '요미우리 쟈이안트' 캐처(포수)출신이다. 선수 때는 자이안트의 캐처 자리를 놓치지 않는 명캐처로서 Best Nine를 8번 수상했으니 수비에는 정평이 있는 것이다. 통찰력과 명석한 두뇌, 연구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메모광으로 유명하다. 베개에도 메모지를 놓고 꿈속에서도 메모를 한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메모를 하는 사람이다.

노무라 감독과도 사이가 좋기로 유명하다. 모리감독은 선수 때는 센트럴 리그의 자이안트의 캐처였기에 일본 시리즈에 올라가며 퍼시픽 리그 승자와 한판을 해야 된다. 이때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南海)의 캐처, 노무라 감독의 집까지 찾아가 지도를 받기로 유명하다. 노무라 감독과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캐처 출신 명감독이다.

▲ ⓒ세이브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
모리감독은 1994년 시즌을 끝내고 용퇴를 한다. 다음으로 젊은 히가시오(東尾)감독이 취임된다. 히가시오 오사무(東尾 修,ひがしお おさむ,1950년생)감독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7년간 감독을 해서 리그 우승 2번을 해 냈다.

히가소오 감독은 1969년 세이브 라이온즈(당시 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입단, 1988년에 은퇴했다. 251승을 올려 200승 이상만 올린 투수가 들어갈수 있는 야구전당에 들어갔다. 최다승 투수 2회수상, 최우수 방어율 1회를 수상하는 등 투수로서는 성공한 선수였다. 프로 입단 초기에는 주전투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야구도박 사건으로 주력투수들이 추방을 당하게 되는 바람이 불어 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에
서 그에게는 주력 투수의 자리가 돌아왔다. 망하는 놈이 있으면 흥하는 놈 나온다는 우리 옛말을 그대로 실현한 선수였다.

타자의 몸쪽 볼을 잘 던지기로 유명하다. 그 바람에 타자 몸에 맞는 데드볼(Ball Dead) 일본 신기록을 가지고 있기로도 유명하며 타자에게 볼을 맞히고도 꿈쩍도 않하는 '싸움 투구'로도 유 명하다. 당시의 명타자 '오치아이(落合)'와 명투수 '히가시오'와의 데드볼 싸움은 지금까지도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장면이 지금 동영상으로 볼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fffJg-o77X0) 이 장면은 볼을 몸에 맞은 오치아이가 일부러 히가시오 투수를 맞히는 타격을 했다고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치아이의 타격술은 천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가시오 투수는 당시의 도루왕 '후쿠모토'에게 도루를 많이 주기로도 유명했다.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많은 화제를 만들기로도 유명했다. 특히 1987년시즌 종료 후에 야쿠자들과 어울려 도박(마작)을 해서 발각되었다. 경찰에 적발이 되고 사죄 기자회견 자리에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볼만 했다(당시 모리감독은 지도의 책임을 물어, 같이 기자회견를 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6개월간 출장정지, 1천만엔의 제재금, 올라갈 예정이었던 연봉 25%이 상의 감봉 처분을 받고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결과적으로 라이온즈는 도박과는 관계가 깊은 팀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감독은 와타나베 히사노브(渡邊 久信,わたなべ ひさのぶ,1965년생 투수출신)다. 2008년에 감독으로 취임, 1년째에 리그 우승, 일본 챔피언이 되었다. 1965년 생으로 일본프로야구 12개구단 감독 중에 제일 젊다. 그런데 1년째에 모든것을 해냈다.

선수때의 와타나베 감독은 고교졸업으로 1983년 드래프트1위로 세이브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1984년부터 1998년간 15년간을 일본에서 선수를 했으며(마지막 1년은 야쿠르트에서 선수),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간은 타이완으로 건너가 선수겸 코치를 했다. 통산 125승을 올렸고(타이완 포함), 일본에서 2번 최다승 투수, 타이완에서 1번 최다승 투수를 했다. 선수때는 미남형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대머리가 되기 시작, 감독으로 기자회견을 할 때의 모습은 선수 때의 미남은 어디가고 대머리 감독의 모습이었다.

와다나베 감독이 선수 시절을 지낼 때는 '관리 야구'가 심했다. '관리 야구'는 팀이 이기기 위해서 선수들을 하나의 부품으로 보고 감독이 있는 벤치에서 모든 지시가 내려오는 것이다. 와다나베 감독 선수 때는 선수가 철저한 하나의 부품이었다. 와다나베 감독은 이런 관리야구가 싫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감성야구' 이다. 선수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마음껏 발휘시켜 결과를 만들고 이기는 야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야구를 도입해서 1년째에 최고봉까지 올라갔다. 앞으로 그가 하고 싶어하는 감성야구가 어떤 결과가 나올런지 지켜보고 싶다.

세이브 라이온즈가 된 이후 1982년부터 2006년까지 계속 A클래스에서 군림한다(시즌 졸료후, 리그 6개팀 중에서 상위3팀을 A클래스, 하위3팀을 B클래스로 분류, A클래스 팀은 패한 경기수보다 이긴 경기수가 많음). 1986년부터 1994년까지 모리 감독이 재임할 때는 거의 매년 리그 우승을 하고 일본 챔피언이 된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 이래의 최강팀이 된다. 세이브 라이온즈는 자이안트처럼 좋은 선수들을 돈으로 영입하는 것도 거의 없다. 다른 구단과 같은 조건으로 드래프트를 통해서 선수들을 공급받고 있다. 그 드래프트를 통해서 들어온 선수들이 당시의 유명선수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선수육성을 잘하는 구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너 기업 회장 츠츠미 요시아키(堤 義明,つつみ よしあき,1934년생) 씨는 실업가지만 일본 스포츠계의 거물이기도 하다. 일본스키연맹 회장, 아이스학키연맹 회장 등 경기단체의 회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올림픽위원회 회장, IOC 명예위원 등 굵직한 스포츠계의 회장직을 두루 맡아왔다. 그런 회장이기에 자기 팀의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보통 아니다.

지금 미국 메이져 리그에서 뛰고 있는 마쓰자카 선수에게는 츠츠미 회장의 명령으로 동계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를 사생활 전담 메니저로 붙여놓아 다른 짓 못하게 만들기 까지 했다. 결과 그는 지금 일본을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이처럼 좋은 선수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오너 기업 회장, 구단, 전용코치진 등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구단이기도 하다.

이런 천하무적 세이브 라이온즈가 기울기 시작했다. 오너 기업의 비지니스 불상사가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특히 2005년에는 오너 기업이 유가증권보고서의 허위기재로 인해 츠츠미 회장이 형사 입건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과, 구단까지에도 불똥이 옮기기 시작, 한때는 구단을 팔려고 내여 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이브 돔과 구단 세트로는 누구도 사지않아서 지금은 구단을 보유하기로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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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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