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역 각 형무소 수형인 및 예비검속자 학살 주범은?
호남지역 각 형무소 수형인 및 예비검속자 학살 주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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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학살 자행했던 만주군 인맥
월간 [말](2003년 5월호)에 게재했던 기사입니다. 표장군의 주장과 일맥상통하길래...

살육자들은 4·3학살 자행했던 만주군 인맥
심층 분석 학살의 배후는 누구인가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인용된 ‘육군 역사일지’ 제 2집을 보면 소위 ‘여수 군 반란 사건’을 기록하면서 대한 민국 군대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한 나라의 국군이라면 국토를 방위하여 그 나라의 안전보장과 인민들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는 데서만 그 존재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렇다. 한 나라의 군대는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는데 그 존재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 군대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생명을 유린하고 재산을 찬탈하거나 초토화했다면,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정도가 아니라 ‘반인륜적 범죄’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범죄행위가 한국전쟁 전후로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그 주범들은 어떤 인물들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죽음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주요한 관건이다. 문헌과 보도자료 등에 나타난 그 주범들의 인맥과 배경 그리고 그들이 행한 범죄행위가 도대체 어디까지 대물림되었는지 그 진실에 접근해보자.

낯익은 ‘악동’들이 벌인 학살의 재현

필자는 미국 정부 문서 보존소(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발굴한 ‘전주형무소 수형인 처형’ 관련 사진 6매를 들고 4월 3일 귀국, 월간 『말』과 공동취재팀을 구성하고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한편 전북대 박광선 교수, 경상대 신경득 교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 김종민 전문위원 등이 측면에서 자료를 제공해주셔서 전주형무소 정치범 학살의 진실에 한층 더 깊이 접근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1948∼1949년 제주도에서 양민학살을 자행했던 살육자들을 다시 만나게 돼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제주도에서 온 몸에 묻힌 피를 채 닦기도 전에 호남으로 옮겨 와 같은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송요찬과 홍순봉이다.

남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상당한 공신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조선인민보』(1950년 9월 5일)는 광주에서의 정치범 처형을 다루면서, 7월 9일, 11일, 20일 등 3차례에 걸쳐 장성군 북하면 성암리 소바위와 북상면 산성규 바위에서 3천여명이 학살됐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 내용 중, 당시 헌병 사령관 송요찬이 광주 헌병대장 홍순봉에게 보낸 지시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른바 학살 명령서였던 것이다. ‘지시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광주, 전주, 목포 형무소에 재감중인 죄수 및 보도연맹관계자와 기타 피검자는 전국관계장, 경찰국장, 형무소장, 검사장과 타협해 직결처분하고 절도 및 기타 잡범은 가출옥 등 적당한 방법을 취하며 각 경찰서에 유치 중인 피검자도 전기에 의거하여 처리하라.”

송요찬과 홍순봉의 이름을 확인한 필자는 국무총리 산하에 있는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팀의 김종민 전문위원에게 긴급하게 몇 가지 자료를 요청했다. 자료 내용은 예상과 일치했다.

홍순봉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경찰)에서 소령으로 계급장을 바꿔 달고 헌병사령관이 되어 광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광주형무소 정치범 처형에 깊숙이 관계하게 된다.

김종민 위원이 보내준 「육군 역사일지 2집」에 따르면 제주 4·3 항쟁 당시 송요찬은 제주도 경비사령부 부대장으로, 홍순봉은 제주도 경찰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송요찬과 홍순봉은 제주도에서 처음 만난 것일까.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엔 육군본부 헌병사령관으로 출세한 송요찬이 알고 지냈던 홍순봉을 광주 헌병대장으로 뽑아간 것일까.

김종민 위원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민족반역·민간인 학살의 인맥

“홍순봉과 송요찬은 일제 때부터 관계가 매우 깊었습니다. 일제 때 송요찬은 일본군 준위로, 홍순봉은 조선인 중에선 최고 직급인 일제 경찰로서 함께 만주에 근무했지요. 또한 해방이 되자 송요찬과 홍순봉은 경찰전문학교에 근무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4·3 때는 제주도에서 한명은 경찰 책임자로, 한명은 군 책임자로 있으면서 제주도민 학살을 진두 지휘했던 것입니다.”

정리해보자. 송요찬과 홍순봉은 식민지 시대에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각각 일본군과 일본경찰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최고직에 올랐던 그들은 제주도에서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주도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엔 각각 헌병사령관과 광주 헌병대장으로 짝을 이뤄 호남지역의 수형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민족반역과 민간인 학살로 얽힌 ‘악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사람 뒤엔 한국전쟁을 전후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할 인물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도영, 정보2과 박정희, 정보4과 김창룡, 육군참모총장 채병덕(후에 정일권으로 교체),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 등이 그들이다.

건국 이전엔 영국상선의 선장이었던 신성모(별명, 캡틴 신)는 이승만의 부름을 받아 귀국한 다음 초대 대한청년단 단장이 된다. 대한청년단은 당시 난무하던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 그리고 이범석 장군(당시 국방부장관)이 이끌던 민족청년단 등을 통합하기 위해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 그러나 이범석은 통합에 반기를 들고 독자 노선을 지향하여 이승만의 분노를 샀다. 서북청년단(대표 문봉제)도 상당히 반발했으나 문봉제가 대한 청년단의 부단장이 되는 조건으로 굴복한다.

신성모는 1948년 10월 제주 4·3사건의 와중에 이승만의 특명을 받고 제주를 방문했다. 그가 제주에서 귀경하자마자 곧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잔인하고 가혹한 대량학살이 시작된다.

한편 1949년 1월 신성모는 내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거세한 자리에 신성모를 전격 기용, 국무총리 서리도 겸하도록 하는 등 막강한 실세로 등장시켰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된 각 형무소의 수형인 처형 및 예비검속자(국민보도 연맹 포함) 대량학살은 모두 신성모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직에 있을 때 행해졌다. 그리고 이런 만행은 미군이 유엔군을 대표하여 작전권을 행사하고 있을 당시에 자행됐다. 이런 대량학살의 최종 책임이 미군과 유엔군에게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미국 원조’ 위해 ‘탄압’ 지시한 이승만

4·3 항쟁 당시 국무회의록에 의하면, 이승만은 각 부처에 ‘어떤 가혹한 수단을 써서라도 제주사건을 탄압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목적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1949년 5월 22일 이승만은 제주사건을 진압하고 맥아더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제주도와 기타 오염된 지역을 완전히 소탕하는데 우리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런 대청소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면 계속해서 해안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쾌속정, 비행기, 해안선을 경비할 중형선박들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이는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주한 미 대사도 이 무렵 본국 국무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섬인 제주도에서 게릴라들이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도록 척결한 것을 보고하게 되어 가장 기쁘게 여긴다….”

미국은 미 군사고문단 5∼6명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제주사건의 진압에 필요한 한국 군경의 모든 물자의 공급과 인원 수송을 전담하였다.

제주사건 결과, 양민 약 3만 명이 희생되고 제주도 전역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당시 포로된 자와 귀순한 자 등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더러는 사형시켰고, 약 3천명의 제주인들에게 중형을 지워 육지 형무소로 분산 수감했다. 이번에 정치범 학살이 확인된 전주형무소도 4·3 관련자들이 이감된 장소였다. 다시 말해 전주형무소의 비극 역시 어느 정도 4·3사건의 연장선에 있다는 뜻이다.

학살을 설명하는 ‘키워드’, 그리고 진상규명

지난 문민정부에서는 ‘거창 사건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1995)이 제정되었고, 국민의 정부에서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특별법’(1999)이 제정되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현 시점에서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은 형평상 모든 유사한 사건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조사 통합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통합 특별법’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유린된 인권을 회복하고 유사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하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동시에 범법자들을 처벌하고, 국가가 나서 희생자 및 유족들에게 사죄와 적절한 피해배상을 해야한다. 국제법적 관례상 대량학살에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이 행위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지향했던 최상의 목표는 이조왕권의 복귀였지 민주정부의 수립이 아니었다. 즉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전 국민의 희생을 강요했을 뿐이다.

전주 형무소 수형인 처형 사건 진상규명을 하는 과정에서 새삼 상기되는 ‘키워드’들이 있었는데, 만주군(신경군관학교), 일본 제국주의 부역자, 사대주의, 서북 청년, 기독교 등이다. (‘기독교’라는 키워드는 4월 13일 새벽 이 원고의 초고를 완성하면서 쳐 넣은 것인데, 이날 오후 학살터 현장을 찾아가서 첫 대면한 ‘기독교 안식관’의 코드가 일치함을 보고 또 한 번 나 자신을 놀라게 만들었다.)

전주와 대전 형무소 수형인 처형사건은 그 과거와 현재가 ‘복사판’ 그대로였다. 학살 주체가 대한민국 군대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들이 벌인 시신의 처리 방법마저 동일하다. 이런 동일성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전의 학살 터 위에는 ‘기독’ 교회를 신축하려다 중단한 상태인데, 전주의 학살 터 위에는 ‘기독교’ 납골당이 웅장하게 건립돼 있었다. 건물 신축 과정에서 노면으로 튀어나오는 유골들이 건축업자들에 의해 함부로 처리된 행위마저 동일했다.

떼죽음의 원혼들은 구천을 맴돌고 살아남은 자들의 원성은 원점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도영 「죽음의 예비검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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