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주 칼럼] 영국의 명문 그래머 스쿨

뉴욕의 아주 비싼 사립고등학교 필드스톤의 신입생 지망이 작년에 비해 14%나 증가했다. 맨해튼에 있는 클레어몬트 사립중학교는 구 아메리카은행 건물을 매입하여 실내수영장과 농구장, 옥상정원을 갖추고 금년에 고등학교 과정을 신설했다. 은행들이 망하고 자동차 회사들이 파산하는 가운데 사립학교에 대한 미국 부자 학부모들의 수요는 경기와 무관하게 왕성하다.

뉴욕시에는 사립학교에 필적하는 명문 공립학교들이 없지 않다. 스타이비슨트 고교, 브롱크스 과학고, 브루클린 기술고 등으로 대표되는 9개의 전문화 고등학교(Specialized Public High Schools)들이다. 학비는 일체 없다. 작년 10월에는 뉴욕 시내 8학년(우리나라의 중2) 학생 2만9000명이 ‘전문화고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6000명이 합격했다. 이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학원도 있다.

영국의 명문 그래머 스쿨

영국의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s)은 중세부터 있어왔으나 영국 중등교육을 중흥시키기 위하여 같은 이름의 공립학교를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매년 전국의 11살배기들을 대상으로 국가고시를 치르게 하여 상위 25%의 우수학생들을 입학시킨다. 이로써 영국의 사립학교 학생수가 10%선에서 5.5%로 한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명문 중학교들은 그 후 영국 정부의 평준화 정책에 의해 대거 문을 닫게 된다. 그 대신 일체의 선발고사를 치르지 못하는 ‘종합학교’들이 등장한다. 전국적으로 1300개가 넘었던 그래머 스쿨이 지금은 230개 정도로 줄었다. 그래머 스쿨의 문이 좁아지면서 영국의 사립학교 학생수는 전체 학생의 8%까지 증가했다.

지금의 노동당 정권은 그래머 스쿨을 더 줄이고 싶어도 줄이지 못한다. 과거에 무상으로 명문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학부모들의 원성이 아직도 크기 때문이다. 야당인 보수당은 그래머 스쿨을 늘리고 싶어도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래머 스쿨이 풍기는 엘리트주의의 냄새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고 공립학교들 간의 약간의 서열화는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명문 공립학교의 문이 좁아질수록 사립학교들은 경기와 무관하게 성장한다. 사립학교에 대한 수요는 우수한 공립학교의 공급과 반비례하며 움직인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북아일랜드에는 사립중학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영국 본토가 평준화 운동을 벌일 무렵 북아일랜드만은 그래머 스쿨을 모두 살려두었던 덕분이다.

우리 정부가 자율형사립고등학교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자율형사립학교는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신 교과과정을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비롯한 6개의 ‘자립형사립고’가 있고 특수목적고등학교 중 30개의 외국어고, 1개의 국제고가 현재 사립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에 추가하여 ‘자율형’ 사립고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굳이 사립고등학교를 대폭 늘린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정부는 시장논리라는 단어로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을 놔두고 현상을 고치겠다는 발상이다. 사립학교에 대한 수요, 나아가 사교육성행은 하나의 현상일 뿐 원인은 공립학교 및 공교육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고등학생 열명 중 한명 이상이 사립학교를 다닌다. CIA의 최근 통계에 의하면 소득불균형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가 우리나라는 0.31로 중간 정도이지만 미국은 0.45로서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다.

우리 정부는 사립학교 이전에 공립 중고등학교의 쇄신방안을 포괄적으로 마련했어야 한다. 영국의 그래머 스쿨이나 뉴욕의 전문화 고등학교와 같은 명문 공립학교를 육성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사립보다 공립학교가 우선

공교육 전반의 질을 높이는 과제는 더 중요한 숙제로 남는다. 경쟁부재로 인한 질의 저하는 공공재 모두의 속성이긴 하다. 스웨덴 교육부 장관을 지내고 현 스톡홀름 시장인 페르 웅켈은 말한다. “교육은 하나의 생산자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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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그래서 스웨덴에는 학교 바우처(school voucher)라는 제도가 있다. 정부가 공립학교에 지원하는 예산을 학생 일인당 금액으로 환산하여 각 학생들에게 쿠폰 식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학생으로 하여금 학교를 선택하게 하는 방법이다. 바우처가 되었던 무엇이 되었던 공교육의 경쟁부재의 숙제는 풀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정부가 할 일이며 온갖 경제적 희생 속에 자녀교육에 힘을 쏟는 학부모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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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내일신문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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