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박사 경제 이야기] 거문오름의 삶과 이야기

▲ 거문오름
지난 주말 아들과 함께 오름을 다녀왔다. 유산소운동도 하고 아들과 추억을 함께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 매주 가는 데 거문오름은 이번이 처음이다.

거문오름의 A코스 태극로 코스는 입구부터 가파른 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어 첫 전망대까지 가는데도 숨이 찼다. 그런데 첫 전망대에 도착할 즈음 손자들과 함께 앞서 올라가는 할머니가 보였다.

평소 영실로 윗새오름에 갈 때 보면 연세가 있는 여자분들이 느린 걸음으로 탐방로를 막아 버려 지체되는 경우가 많다. 가고 싶으면 가고, 서고 싶으면 서는 ‘허’ 차량들처럼.

그런데 그 할머니는 힘들어 하는 손자들보다 더 경쾌한 걸음으로 익숙하게 오르고 있었다. 그냥 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름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손자들에게 상세한 설명까지 하면서. 순간 나는 마을조사를 다니며 익힌 눈치와 감각으로 할머니 곁에 바싹 다가갔다. ‘소중한 도움 말씀 주실 어르신이다’는 걸 직감하며.

거문오름 옆 백하마을에서 나서 지금껏 살아오신 이○○할머니(81세)에게 거문오름은 한평생 생활의 터였고 거친 세월을 견뎌낸 개인생애사가 녹아있는 곳이다. 이할머니는 거문오름에서 소와 말을 키우며 농사도 짓고, 숯을 구어 팔고 양애, 드릅, 늘굽 등을 수확하며 살아왔다. 그뿐 아니라 아프거나 하면 흰돌(아마 병풍바위 평판석)에 난 거북손을 뜯어다가 바르고 천남성의 붉은 열매를 약으로 사용하며 생활해 왔다고 한다.

이할머니가 ‘우리 오름’ 이라고 칭하는 거문오름에는 옛날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움막터(상주하기 보다는 농사나 숯을 구울 때, 소나 말을 방목했을 때 일시 거처한 것으로 보임), 화전민 거주터(이 오름에서의 농사는 이동식농업 혹은 화전식농업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마을을 형성하여 농사를 짓는 화전민 혹은 화전마을이 있었다기 보다는 농사철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추측된다), 종가시나무와 붉가시나무 등으로 숯을 구었던 숯가마터(돌가마)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오름이 산기슭에는 오름 근처 마을에서 태어나 오름과 더불어 살다가 일생을 마친 마을사람들의 무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고 이외에 일본군 지하갱도와 화산탄, 풍혈, 병풍석 등이  있다.

이할머니가 이 오름에서 농사짓고 숯을 굽게 된 것은 1940년경 이할머니 시아버지가 현금 100만원을 주고 이 거문오름을 산 뒤 부터이다. 1960년대 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거문오름 소유가 몇 번의 재판과정을 거친 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때 까지 이할머니는 숯을 구어 성안에 가서 숯 10가마니에 좁쌀 서말 받고 팔아 생활하고, 거문오름 굼부리 밭에 피나 메밀을 경작했으며 소와 말로 바령(밭을 쉬게 하여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려는 의도. 밭을 쉬게 하는 동안 소와 말을 ‘바령팟’에 담고 소와 말의 오줌과 똥을 받아 밭이 기름지게 하였음)도 하였다. 아마 지금 살아있다면 61살 되었을 큰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내며 모질 게 ‘4.3’을 견디어 낸 곳도 이 거문오름이다. 

숙연해야 할 이 대목에서 갑자기 전공(專攻) 본능이 잠시 살아났다.

 “어르신 정말 100만원이라 나수가?, 그 당시 100만원이면 큰돈이라 나실건디”.
“큰돈이라 낫주. 우리시아버님이 키도 크고 풍채도 좋아 나신디 그 당시 백만원 줭 이 오름을 삿덴 허여. 그때부터 여기에서 농사도 짓고 숯도 구어 팔고 쇠나  키우멍 살았주. 저 아래에 있는 밭담들도 다 우리가 단거라”

100만원이라. 거문오름의 넓이는 809,860㎡(245,412평)이다. 그렇다면 대략 평당 4.07원(圓)에 샀다는 것인데,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1939)에 의하면 1939년 4월말 현재 제주지역 민유과세지(民有課稅地)의 평균지가(평당)는 전(田) 4.56원, 답(畓) 36.34원 대(垈), 52.89원 평균 5.95원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임야는 전의 1/5에서 1/10 수준이었다. 그런데 평당 4.07원이라면 1940년대 초 웬만한 밭의 수준으로 타 임야에 비해 1/10~1/5 정도 비싼 지가이다. 구입 당시 이미 무형의 자산가치를 예견한 것일까?

관광지 개발의 모범사례로 거론되는 남이섬은 1965년 전 한국은행 총재 민명도씨가 퇴직금을 모아 구입한 사유지이다. 1965년 당시 한국은행 총재의 퇴직금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현재 기준으로 3억 원에서 5억원정도라고 가정한다면 46만평의 땅콩밭을 5억 원 미만에 구입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 남이섬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평당 100만원씩만 계산해도 4,600억 원이 되고 여기에 관광지로서의 브랜드가치 5,400억 원을 더하면 족히 1조원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 1940년경 100만원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던 거문오름의 현재 자산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지가(地價)로만 보면 평당 100만원으로 잡고 26만평에 2,600억원이다. 그러나 무형의 가치는 측정이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어 보인다. 다만 어린 짐작으로 남이섬의 예를 빌어 계산하면 2,500조(연2.5조×1,000년) 정도일 것이다. 이 무한한 무형의 가치는 앞으로 우리하기에 달려있다. 우리하기에 따라 1경(京)도 되고 반대로 1조가 될 수 있다.

이 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넷, 딸 다섯분을 두었다. ‘4.3’ 때 떠나보낸  큰아들 포함해서 아들 셋, 딸 한분을 가슴에 뭏고 지금은 마을리장하는 아들 한분과 딸 네 분,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 건강하게 살고 있다. 지금 이할머니는 할머니를 ‘기십’나게 하는 손자, 손녀들이 있어 매순간 사는 게 즐겁다고 한다. 이날도 이할머니와 조상들의 삶과 역사가 남아있는 거문오름의 이야기를 손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손자들과 막내사위를 재촉했다. 할머니가 죽으면 아무도 모르게 모든 게 잊혀질 것 같아서. 지금 아니면 기력이 없어 못 올 것만 같아서.

▲ 진관훈 경제학 박사
제주의 오름은 풍광이 뛰어난 자연유산만이 아니다. 대자연의 신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주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고 살아온 이야기이다. 이 거문오름도 빼어난 제주도의 지질·식생들의 보고(寶庫)일뿐 아니라 오름마을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생활유적인 셈이다. 제주의 오름에는 기록하고 남겨 전해야 할 제주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주 많다. /진관훈 경제학 박사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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