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보 선생 '옥사', 강창거 선생 '일본서 사망', 사위 '국보법' 8년간 옥살이

   
▲ 고성화 선생과 강영원 여사가 강창보 선생 추모비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일제 36년 동안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도 36년간 지속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해방 후 한평생 독립운동에 앞장서 온 항일투사들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학계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언론보도를 통해 일반인들도 흔히 알고 있는 실정이다.

좌절된 친일청산, 이데올로기에 의한 남북분단 등으로 여전히 친일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 대다수는 해방 후 60년이 다되도록 푸대접을 받고 있다.

특히 항일운동가 중 '사회주의 계열'은 말할 것도 없다. 비록 올해 정부에서 54명의 좌익.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등 어느 정도 복권은 이뤄지고 있지만 후손들은 여전히 일제강점기다.

   
이런 불행한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항일투사 후손이 있다. 일제시대 제주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대부라고 불리는 '고 강창보 선생'과 그 후손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강창보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할 수 있는 강영원 여사(66)가 1일 제주를 찾아 3.1절 기념행사에 참여했다.

강영원 여사가 제주를 찾은 이유는 60년만에 큰 아버지인 강창보 선생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됐기 때문.

강원영 여사의 가계는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집안으로 꼽을 수 있다. 큰아버지 강창보 선생과 아버지 강창거 선생이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수차례 감옥을 드나들었다.

강창보 선생은 1925년 '신인회'라는 사상단체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후 도내에서 일어난 '혁우동맹'(야체이카) '해녀항일투쟁' 등 대부분의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강창보 선생이 자리해 있었다.

강 선생은 1943년 일제경찰에 검거돼 7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 해방을 8개월여 앞둔 45년 1월7일 감옥에서 옥사했다.

강 선생의 부인은 해방 후 제주도에서 홀로 살다 모요양원에서 별세했고, 아들인 강주한 선생 역시 불우한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강 선생의 동생으로 8살 밑인 강창거 선생 역시 항일운동을 벌이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전형무소에서 2년6개월 복역했다.

   
강창거 선생은 1930년대 후반 도일한 후 1945년 해방이 되자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전력 때문에 감시를 받아 5년 동안 5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선생의 가족은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1950년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강창거 선생은 이후 한번도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2004년 11월17일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강 선생 집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원영 여사의 남편인 고병택 선생도 박정희 정권시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8년간 옥초를 겪었다.

고병택 선생은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1974년 일본에서 고향 제주도에 들어왔다가 '장인' 가족이 사회주의운동 전력 때문에 8년동안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강 여사는 "큰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남편까지 대전교도소에서 수감됐었다"며 "참 기구하기도 하고, 이때부터 한국이라는 나라를 무서워했었다"고 털어놓았다.

강 여사는 "남편은 8년간 복역하는 동안 고문과 가혹한 옥살이 휴유증 등으로 지금은 파킨스병을 앓아 거동이 불편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고 선생은 대전교도소에서 아주 우연히 남로당 활동으로 비전향장기수로 복역중인 고성화 선생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고성화 선생은 강창보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 때의 인연으로 고성화 선생은 1993년 출소한 후 강창보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지난 2002년에는 '추모기념비'를 세우고 넋을 기렸다.

또 고 선생은 강창보 선생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사인 강관순.김순종 선생을 보훈처에 대신 접수시켜주기도 했다.

강 여사를 이날 한국에 부른 것도 고 선생이었다. 3.1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강 여사와 고 선생은 제주시 용강동에 있는 고 강창보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강 여사는 "아버지(강창거 선생)는 평생 큰아버지를 삶의 지표이자 '스승'으로 생각하셨다"며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큰아버지는 대규모 집회 연설보다는 좌담회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분이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강 여사는 "아버지가 저를 특별히 가르쳐 주신 것은 없지만 한번도 일본식으로 이름을 쓴 적이 없었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강 여사는 명함에도 한문으로 된 이름을 적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아주 정확하게 말했다.

이어 "60년 동안 잊혀진 줄 알았던 큰아버지의 올바른 행동이 한국에서 드디어 빛을 보게 돼 너무 기쁘다"며 "하지만 아버지가 조금만 사셨더라면 이런 날을 보게 됐을테데…"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강 여사의 아버지 강창거 선생은 불과 몇달 전인 지난해 11월17일 돌아가셨다.

강 여사는 또 하나의 바램은 아버지 강창거 선생의 항일운동도 정부에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강 여사는 고성화 선생의 도움을 지난해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한 상태다.

고성화 선생은 "제주지역에서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대부분은 사회주의 계열"이라며 "이제 정부가 이들을 복권시켜 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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