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의 살며 생각하며] 리콜안됐다고 불량품이 상품으로 둔갑 않아

제품 리콜제라는 것이 있다.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다.
불량한 제품은 리콜되어 하자가 없는 새 제품으로 교체 받아야 한다. 기업은 당연히 리콜제를 마뜩치 않게 여길 것이다. 자사의 제품이 리콜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만큼 기업 이미지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구자를 상대로 회유를 하거나 책임을 청구자에게 떠넘기려고 얕은 꾀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현명한 기업은 청구자에게 솔직히 제품의 하자를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기꺼이 리콜을 받아 줄 것이다. 그것이 기업의 미래를 보다 멀리 내다보는 경영철학이다. 리콜되지 않았다고 불량한 제품이 양호한 제품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니다.

주민소환제도 마찬가지다. 지방자치시대 주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제도이다.
주민의 전체 이익에 반하는 반민주적 정책을 결정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불량한 자치단체장은 소환되어 새 인물로 교체되어야 한다. 물론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퇴출되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안다. 그러나 현명한 자치단체장이라면 뽑아준 주민들이 왜 자신을 소환하려고 하는지 이 기회에 자신을 냉정히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토론회나 연설회에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여 자신을 심판해 달라고, 주민의 다수가 찬성하면 겸허히 뜻을 받들어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밝힐 것이다. 어떻던 소환을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잔머리를 굴려 갖은 방법으로 투표 불참을 유도하고, 선거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야비한 술책은 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적어도 순리요 상식이다.

이번에 실시된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주민소환 투표는 전방위에 걸쳐 매우 조직적으로 자행된 관권 타락선거였다.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라고 조소의 대상이던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공화당 시절에도 이렇게 철저히 기획된 관제동원선거는 없었다. 투표율 11%에 담긴 수치는 관의 입김과 압력에 주민들의 무관심, 무소신,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제주도의 괸당문화가 가세한 결과물이다. 주민소환 청구 서명인이 예상외로 많고, 두 번에 걸친 언론사의 여론조사가 모두 불리하게 나오자 소환 대상자는 적극적인 투표 불참 전략을 구사했다. 유권자의 1/3 이상이 투표하지 않으면 아예 투표함을 개봉하지 않는다는 법의 맹점을 악용해 선거 자체를 무산시킬 꼼수를 노렸다. 주민의 직접 선거로 뽑힌 도지사가 소환될 위기에 처하자 소환찬반을 묻는 투표에 불참하라고 선동 했다. 선출직 최고 공직자의 윤리를 저버린 매우 비열하고 치졸한 막장 전략을 택했다.

유권자의 기본 권리인 투표 행위를 불온시하고, 투표함이 무슨 판도라의 상자라도 되는 양 투표함을 여는 순간 새로운 갈등과 불행이 시작된다고 공공연히 겁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선거 막판에는 투표함을 개봉해 마을별로 찬반 비율이 나오면 마치 불이익이라도 당할 것처럼 협박조의 발언을 했다. 투표 행위를 곧 소환찬성으로 규정하고 사갈시 하는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조금이라도 관의 입김이 작용할만한 개인이나 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한마을에서 ‘삼춘, 조케’ 눈치를 봐야하는 지역의 정서를 고려할 때, 주민들은 투표장에 가는 것 자체가 커다란 심적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관제동원은 말단 행정조직과 청년회, 부인회, 노인회 같은, 도 보조금을 받는 자생단체까지 조직적으로 관철되었음이 밝혀졌다. 투표장 주변에 불참을 권유하는 홍보물을 내다 붙이기도 했다. 투표자 명단이 투표소에 나돌기도 했다. 주민감시체제가 작동한 것이다. 선관위에서 내건 선거홍보 펼침막도 누군가의 손으로 철거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적극 투표를 독려하고 선거부정 행위를 단속해야 할 선관위도 막중한 책임을 저버리고 수수방관으로 일관했다. 선거 당일 소환운동본부에 제보된 투표 방해 부정 사례만도 40 건을 넘는다고 한다.

지난 행정구조 개편 주민투표 시엔 투표율과 찬성률을 높이기 위해 전 공무원을 닦달하더니 이번엔 투표율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들을 또 철저히 이용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가. 기회 있을 때마다 도지사 개인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부초처럼 휩쓸려 다니는 제주도 공직사회에도 뼈아픈 자정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공무원은 지사 개인의 심복이 아니라 주민의 공복이란 상식을 명심하자.
 
양심도 부끄러움도 원칙도 몽땅 쓰레기통에 내다짓밟고, 민주사회의 법질서를 유린하고, 절차의 정당성을 파기하면서 자리보전을 꾀한 그를 우리는 다시 지사로 인정해야 할까. 소환의 이유가 된, 전체주민의 이익에 반하는 강정 해군기지 유치, 영리병원, 내국인 카지노, 한라산 케이블카 추진 문제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리콜되지 않았다고 결격이 하루아침에 적격으로 둔갑하는 건 아니다. 실정법은 그의 소환을 부결시켰지만 양심과 정의의 법정은 끝내 그를 소환할 것이다. /김현돈(제주대 철학과 교수)

 

▲ 김현돈 ⓒ제주의소리
<김현돈 교수 약력>
-부산대학교 졸(철학박사)
-문화방송 주간 독서신문 기자
-(현)제주대 인문대 철학과 교수
-(현)(사)제주대안연구공동체 원장
-저서 <사회문화비평집-그대 주류를 꿈꾸는가> <미학과 현실>
-공저 <상생의 철학> <세계화 시대의 사회문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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