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줌(12)]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레이’

솔직히 말해 봐요, 날 사랑하세요? 아니에요, 앞 못 보는 당신을 동정해요. 알고 있어요, 동정이어도 좋아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마디는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당신을 볼 수 없지만 어루만질 순 있어요. 그러니 가지 말아요, 오늘밤 나와 함께…….

   
미국의 대중음악을 다시 쓴 레이 찰스 로빈슨은 늘 이런 식이다. “나는 음악과 함께 태어났고, 음악은 내 피처럼 내 일부”라고 말한 그는 마약과 즉흥, 자욱한 담배연기와 여자들이 떠나지 않는다.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마다 신들린 듯 노래가 태어나고, 빵 한 덩이 무게의 생명이 태어난다.

   
영화 속 ‘레이’도 예외는 아니다. 일곱 명의 여자를 만나 두 번 결혼 후 이혼하고, 공식적으로 아홉 명의 아이를 낳은 그의 여성편력은 감추어져 있으나 그의 노래만큼은 끊이지 않는다. 영화 속 레이를 찾아가는 길도 노래로 시작해 노래로 막을 내리고 있는 것.

물통에 빠져 익사한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레이 찰스(제이미 폭스 분). 의사는 레이의 어머니 아레사 로빈슨(샤론 웨렌 분)에게 아들이 머잖아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내린다. 그리고 아홉 달 후, 의사의 말대로 레이는 일곱 살의 나이로 실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두 번까지는 이 엄마가 도와주마.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네 힘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 살아가더라도 이 엄마의 말을 잊지 말거라. 육신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가 더 고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어머니. 방에 불을 켜도 내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동생이 죽고,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떠나고, 영화 속 레이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길을 나선다. 그가 그레이하운드에 몸을 실으며 달려간 곳은 시애틀의 재즈클럽. 그의 인생에서 빠트려선 안 될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륙종단은 레이 찰스의 히트곡과 함께 한 굽이씩 넘어간다.

‘나만의 음악은 무엇인가?’

   
선배 스타들의 창법을 넘어서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고민하는 레이. 첫 번째 아내가 될 델라 비 로빈슨(케리 워싱턴 분)을 만나 가스펠(교회음악)에 블루스를 접목시킨 ‘I've Got a Woman'으로 그는 ‘소울(soul)’ 장르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기독교를 조롱하는 듯한 그의 장르개척은 도전을 받게 된다. 성스러워야 할 가스펠 곡들이 얌전한 신도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교회 음악의 전통과 형식을 파괴한 ‘소울’ 음악은 그렇듯 혁신을 꾀한 그의 대담함과 함께 자리를 굳혀간다.

블루스에서 가스펠로, 가스펠에서 소울로 넘어온 레이 찰스의 도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백인가수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컨트리 송을 건드린 것. 컨트리와 웨스턴을 새롭게 해석한 앨범이 나오자 장르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는 순수주의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팬들까지 들고 일어선다. 그러나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1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히트앨범으로 돌변하고, 미국 어느 곳에서라도 라디오를 틀면 ‘I Can't Stop Loving You'가 흘러나온다.

리듬&블루스, 컨트리 팝, 재즈, 로큰롤 등 레이 찰스가 부르지 못한 노래는 어떤 노래였을까?

화면은 계속되는 장벽을 넘어 인종차별이 공공연했던 1960년대를 비춘다. 그의 고향 조지아 주다. 그러나 레이 찰스는 흑인과 백인의 객석이 다른 것을 알고 공연을 취소해버린다. 그로 인해 고향인 조지아 주로부터 영구공연금지 처분을 받게 되는 레이 찰스.

순간,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루이 암스트롱이 스쳐간다. 마틴 루터 킹과 블랙파워 운동의 중심에 섰던 존 콜트레인의 열정이 그 뒤를 따른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흑인의 삶이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던 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행위. 흑인영가도 그러했고, 랩, 재즈도 그러했다. 이 모두가 인종차별과 억압에서 저항의 도구로 생겨난 것이다.

   
‘사관과 신사’, ‘라밤바’의 테일러 핵포드 감독이 연출한 ‘레이’. 그런데 아쉽다. 74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레이 찰스 로빈슨의 음악열정은 뒤로하고라도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알토색소폰과 트럼펫, 클라리넷은 어디로 가고 오르간만 다루고 있는 것일까?

아쉬운 마음에 물음표 하나를 찍고 나자 누군가 길을 가로막고 선다. 레이 찰스의 정부이자 백 코러스인 마지 헨드릭스(레지나 킹)다. 아, 그랬었구나! 저 여자의 뜨거운 열정과 애욕의 사랑이 없었다면 레이 찰스의 장벽은 또 얼마나 높았을까?

솔직히 말해 봐요, 날 사랑하세요? 아니야, 너를 필요로 하고 있어. 아무래도 좋아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마디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는 것, 내일 아침 당신과 마주할 수 없다면 난……. 그러니 가지 말아요, 오늘밤 나와 함께…….

노래가 흐른다. What'd I Say, Mess Around, 그리운 조지아, 내 마음의 사슬……. ‘Georgia On My Mind'는 그 후 금지곡의 사슬에서 풀려나 조지아 주의 공식 노래로 선정 되었다고 했던가. 그래미상에 빛나는 그를 말하기 전에, 그의 영혼이 담긴 음악을 말하기 전에, 세상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다는 집념을 말하기 전에, 2005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제이미 폭스에게 박수를 보낸다.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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