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다가온 제주의 꽃들(57)

▲ ⓒ김민수
봄의 전령으로 잘 알려진 꽃은 개나리와 진달래, 그 중에서도 먼저 피는 개나리가 언제 피는가하는 뉴스는 해마다 봄에 듣는 단골메뉴다. 그러나 개나리보다도 먼저 피는 꽃들이 들으면 서운할 일이다. 개나리가 꽃망울을 만들 때쯤이면 이미 눈 속에 피어있는 복수초, 그리고 노루귀, 서향, 앉은부채는 물론이요 양지바른 마을 근처의 텃밭이나 논두렁에 피어있던 쇠별꽃이나 광대나물(코딱지풀)꽃이 '봄의 전령은 나요!'하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 ⓒ김민수
올해는 겨울이 지리했다.
봄이 늦게 온다고 하는데 제주도 역시도 봄이 적어도 일주일 가량은 늦어지는 것 같다. 이미 봄이 온 듯 복수초가 입춘에 맞춰 신고식을 했는데 입춘 뒤에도 몇 차례 폭설과 강추위가 이어져 피었던 꽃들이 눈 속에 묻혀 짓물러버리기도 하고, 잔뜩 몸을 움추렸다. 그래도 한 번 핀 꽃들의 행렬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봄은 봄이다.

▲ ⓒ김민수
올해 들어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꽃이 있었다.
작년엔 2월 하순에 눈맞춤을 했으나 이미 만개한 뒤 한창 때의 빛을 잃어버려서 온전히 한 해를 기다리게 만든 '변산바람꽃'이 그것이었다. 3월이 시작되었는데도 중산간에는 지난 겨울 내렸던 눈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또 늦어버린 것은 아닌지, 이번 주에 만나지 못하면 또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변산바람꽃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따스한 3월의 햇살이 더욱 부채질 했다.

꽃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전하는 봄꽃 소식들이 들려올 때 가장 먼저 복수초들이 하나 둘 장식을 하고, 일주일 가량 지나면 변산바람꽃과 노루귀가 등장을 한다. 그 후에는 워낙 속도가 빨라서 딱히 그 순서를 기억할 수 없으니 봄의 전령은 어쩌면 개나리나 진달래가 아니라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이 아닐까?

▲ ⓒ김민수
바람꽃의 종류도 다양하다.
덕유산 근방에 핀다는 나도바람꽃, 태백산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꿩의바람꽃과 회리바람꽃, 소백산에서 핀다는 쌍둥이바람꽃, 통일의 꿈을 담아 휴전선 근처에서 피는 홀아비바람꽃, 한라산에서 만나는 세바람꽃 등등 바람꽃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어떤 이는 '바람꽃'은 실재하는 꽃이 아니라 상상의 꽃이라고 했다니 보이지 않는 바람에 대한 상상력이 지나치게 동원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변산바람꽃.
그 이름만 듣고는 '변산'에 있는 것인가 했는데 제주에서 그를 만났다.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필시 변산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었으니 그 이름을 얻었을 것인데 제주에서 먼저 발견을 했다면 '제주바람꽃'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이고, 저 남녘 땅 제주에서부터 들려오는 바람꽃의 소식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바람꽃은 말 그대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정도로 아주 연약해 보인다. 그러나 고난의 겨울을 뚫고 피어나는 자태를 보면 외유내강의 꽃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 꽃을 처음 만났던 지난 해, 발바닥이 간지러워서 걷질 못하겠다. 지천에 피어있는 변산바람꽃을 밟을까봐 발 밑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고 한 걸음 한 걸음 띠는 것이 쉽지 않아서 엉거주춤 걷는다. 그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밟혀있는 변산바람꽃에게 '미안해, 그렇게 추운 겨울을 뚫고 피었는데'했다. 그런데 함께 봄맞이를 나갔던 지인이 한 마디 한다.

"일부러 밟을 필요는 없지만 밟아 주면 내년에는 더 많은 꽃을 피우니 걱정할 것 없답니다. 그냥 편안하게 걸어다니세요. 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니까요."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꽃.
산들산들 봄바람에도 흔들리지만 그 고난의 겨울도 뒤로하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꽃을 보면서 외유내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다시 한번 곰씹어보게 된다.

▲ ⓒ김민수
봄이 천천히 오는 바람에 이제 막 피어나는 변산바람꽃을 만난 터라 활짝 핀 꽃을 담지는 못했지만 일주일 후면 흐드러지게 피어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꽃 무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머지 많아 봄소식이 이 바람을 타고 꽃향기를 듬뿍 안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다.

※ 김민수님은 제주의 동쪽 끝마을에 있는 종달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것을 즐겨 합니다. 자연산문집 '달팽이는 느리고, 호박은 못생겼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글은 '강바람의 글모음 '을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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