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편지(10)] 제 몸 살라 사랑하는 이 살리려는…

▲ 백록담 건너편 돌무더기가 쓸려내린 곳에 조정철의 마애각이 있다.ⓒ오희삼
한라산 정상에는 화산폭발로 형성된 바위들이 무덕져 있습니다.
검은 색의 바위들 중에 칼로 베어낸 듯 반반한 곳에는
정성스런 백공의 손길에 새겨진 글씨들이 있습니다.
마애각(磨崖刻)이라 합니다.

▲ 한라산 백록담에 남아 있는 조정철 목사의 마애각.ⓒ신용만 사진작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정상의 바위들은 세월의 풍파에 쓸려 백록담으로 구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동강난 바위에 새겨진 한 마애각이 있습니다.
‘조정철은 정유년(정조 원년, 1777) 이곳에 귀양 와서 경술년(정조14년 , 1790) 에 풀려났다.’
‘조정철은 신미년(순조11년, 1811)에 방어사로 와서 이 곳 절정에 이르다’ 고 기록된 것이지요.
조정철은 북헌 김춘택, 우암 남구명과 더불어 제주삼문학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시대의 문인이었습니다.
청춘 시절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조정철에게는 성춘향과 이몽룡이라는 허구속의 이야기보다 더 애틋하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제주도를 찾았던 선인들은 단단한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마애각을 남겼다.ⓒ오희삼
너무 멀고 험해서 원악도(遠惡島)라 불렸던 제주도는 예부터 유배의 땅이었습니다.
정조(正祖) 시해사건에 연루된 조정철(趙貞喆)이 이곳에 유폐된 것은 정조 1년(1777).
스물 다섯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며 승승장구 청운의 꿈에 부풀었던 그에게 제주도에서의 유배생활은 그야말로 천형(天刑)의 세월이었습니다.

절해고도의 제주에서 대역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선 이가 있었습니다. 섬처녀 홍랑이었습니다.
섬에 갇혀 두문불출하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던 조정철에게 연민의 정을 품었던 그녀는 고고한 선비의 품성을 지닌 그에게 점차 빠져들었고, 조정철 또한 상아처럼 곱고 단아한 홍랑의 헌신적이고 정성어린 마음에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랑해선 안 될 죄인과의 기구한 사랑이었으니 더욱 애틋하고 간절하였고, 두 사람의 마음을 담은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던 순간도 잠시, 두 사람에겐 슬픈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조정철 집안과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정적(政敵)이던 김시구가 신임 제주목사로 부임되어 왔습니다.
조정철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목사는 모역죄인을 옭아매어 기어이 사형시키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 그물에 홍랑은 여지없이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 200년의 세월이 지난 홍랑의 비석.ⓒ오희삼
거짓 증언을 강요하는 목사의 혹독한 고문이 홍랑에게 가해졌지요. 옥같던 고운 얼굴에 피범벅이 일고 건장한 남정네도 견디기 어려웠을 남장(濫杖)이 갓난아기 어미에게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홍랑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였습니다.
형률(刑律)에도 없는 남형(濫刑)을 거두라며 절규하였습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사모하는 이의 목숨이 달려있음을 알고 있는 홍랑은 여리고 약했으나 당당하였습니다.
그 당당함 만큼 목사의 분노는 타올랐고 고문은 강도를 더했습니다.
동헌 마루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린 홍랑은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요.
아니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고통을 잠재우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명할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정철을 지아비로 맞은 지 2년을 못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아이는 이제 겨우 백일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였습니다.

▲ 제 한 몸 살라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하고자 의로운 죽음의 길을 걸어간 홍랑의 무덤.ⓒ오희삼
홍랑의 죽음을 적소에서 전해들은 조정철.
그 뼛속까지 사무쳤을 비통한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용광로처럼 솟구치는 뜨거운 분노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슬픔에 목이 매였을테지요.
그 심정으로 눈물을 삼키며 비가(悲歌)를 불렀습니다.

외로운 신 목숨을 건져 피눈물로 임금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이 거친 섬 한 사또의 계율에 달렸네
어제 미친 바람이 한 고을을 휩쓸더니
남아 있던 연약한 꽃잎을 산산이 흩날려 버렸네.

홍랑이 죽자 조정철도 동헌에 끌려가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상여가 지나가며 구슬프게 들려오는 해로성(薤露聲)을 옥중에서 들으며 조정철은 다짐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너의 억울한 이 원혼을 반드시, 반드시 달래주마’

애초에 지은 죄가 없었던 그였기에 담담하게 조사를 받았고, 4개월만에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기어코 살아남아야 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버린 아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조정철은 살아남아야 했을 것입니다.
무혐의로 풀려난 조정철은 그 뒤로도 여러 곳을 떠나니며 고독한 유배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홍랑이 떠나간 빈 자리를 누가 있어 채워줄 수 있었을까요.

초로(初老)에 접어든 조정철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쳤습니다.
55세 되던 해에 드디어 기나긴 유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정조의 승하로 새 임금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지요.
스물 일곱의 젊은이가 초로의 늙은이가 되어 자유의 몸이 된 조정철에게 제주도는 일생의 황금 같은 청춘을 옭아맨 눈물의 땅이자, 평생을 잊지 못할 홍랑과의 인연을 맺어준 그리움의 땅이었습니다.
다시 관직에 중용된 조정철은 꿈에 그리던 제주목사가 되어 제주에 왔습니다.

▲ 소복하게 눈에 덮인 홍랑의 무덤.ⓒ오희삼
검푸른 파도를 넘고 넘어 화북포에 내리던 날, 조정철은 마중 나온 관리들의 영접을 뿌리치고 서둘러 어딘가로 갔습니다.
남성(南城) 밖 한내(漢川) 가에 있던 홍랑의 무덤이었지요.
홍랑의 분신이자 유일한 핏줄이던 딸과 함께 홍랑의 묘 앞에서 목매어 울었습니다. 울다 지쳐 무덤에서 밤을 지샜습니다.
다음날 무덤을 단장하고 비를 세우며 조정철은 비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
일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제 한 몸 살라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하고자 의로운 죽음의 길을 걸어간 홍랑.
그런 그녀의 의로운 순결을 가슴 깊이 간직하여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비로소 원혼을 달래고자 했던 조정철.
아마도 다른 세상에서 아름다운 해후를 맞이했을 테지요.

▲ 홍랑의 무덤은 애월읍 유수암리 지경의 산중턱 저녁햇살 비치는 들녘에 있습니다.ⓒ오희삼
아름다운 영혼이 잠들어 있는 홍랑의 묘는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전농로 옛 제주농고 터에 있다가 지금은 애월읍 유수암리 지경의 산중턱 저녁햇살 비치는 들녘에 있습니다.
그녀를 기리는 뜻에서 ‘홍랑로’도 생겼더군요.

제주목사가 된 조정철은 한라산 정상에 올라 이 한 많고 설움 많던 이곳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새겼습니다.
조정철은 홍랑과의 인연을 새기며 제주목사 재임시절 보은의 마음으로 많은 선정을 베풀었고,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제주도와 제주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했습니다.

백록담 동벽에 있던 마애각(磨崖刻)은 200년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다 백록담으로 굴렀습니다. 다행히도 글씨가 새겨진 면이 드러나서 영원히 묻혀버릴 위기에서 벗어난 셈이지요.

백록담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한갓진 곳에 드러누운 바위를 보며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변치 않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굳세었던 사람의 순결한 마음을 떠올립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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