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0여건 주민투표, '직접민주주의' 살아 있다는 증거

지난 해 전국의 광장을 밝혔던 촛불집회를 두고, '대의제 정치의 한계를 절감한 시민들이 보수독주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참여한 주체적 활동'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비록 촛불정국이 당국의 공안탄압으로 사그라들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 대통령의 사과를 이끌어냈고, 미국산 수입쇠고기의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켰으며, 관련 장관의 교체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 성과 또한 크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은 촛불집회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싹을 찾으려 했고, 촛불이 사그라진 이후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 촛불집회 촛불정국 이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 장태욱

이런 분위기에 맞춰 지난 해 말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이 'IRI(The Initiative and Referendum Institute, 시민발의 및 국민투표연구소)와 공동으로 기획해서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를 출간했다. IRI는 직접민주주의의 역사와 실천을 연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지난 2001년에 문을 연 유럽 최초의 직접민주주의 싱크탱크다.

"아이들에게 책임을 지우면 지울수록 성숙해지고, 그래서 마침내 성인이 됩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민을 아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대표만 뽑으면 모든 책임을 다른 데 넘겨버리는 것이지요. 뽑아놓고 잘못되어도 불평만 늘어놓는 게 대의제입니다. 직접민주주의는 시민의식이 성숙한 어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직접민주주의의 구조는 개인도 집단도 성숙시키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혜택은 정부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돌아갑니다."(경향신문, 2008년 12월  18일)

마이크 그레벨(Mike Gravel·78·전 미 연방 상원의원) '민주주의재단' 설립자가 지난해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한국에 왔을 때 남긴 말이다. 대의제 정치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와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이 그의 말속에 잘 녹아 있다.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는 IRI가 2007년 발행한 '직접민주주의 가이드북'의 내용에 한국의 직접민주주의 사례들을 덧붙여서 만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 종주국이 스위스인 만큼 스위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소개가 '가이드북'의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종주국'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1년에 서른 건도 넘는 안건에 국민투표

19세기 스위스에서 처음 등장한 직접민주주의는 '국민투표'와 '주민발의'를 두 개의 축으로 하고, 3가지 제도를 활용한다. 헌법에의 변화를 시도할 때 반드시 실시해야 하는 '의무적 국민투표'와 '법 개정시 5만 명 이상 국민의 요구가 있을 때 거치는 '선택적 국민투표' 및 일정 수 이상의 유권자의 지지가 있을 때 헌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법률을 입법하도록 제안할 수 있는 '시민발의' 등이다.

스위스에는 대통령이나 의회가 자유재량에 의해 주도하는 동원된 국민투표는 없다. 경험에 의해 "시민발의 국민투표가 시민들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반면, 정부 주도의 국민투표는 권좌에 있는 자들의 권력 행사의 한 수단이 될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스위스인들은 4년에 한 번 연방의원을 뽑고, 1년에 네 번(보통 3개월에 한 번씩 일요일에 실시된다) 수많은 법안들에 대해 투표한다. 간단한 절차로도 주민발의가 가능하며, 주민들의 발의 내용을 발의위원회에서 정리해 입법과정을 거친다. 발의된 법안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을 거치고, 그 과정을 거치면 국민투표를 통해 채택이나 부결이 결정된다.

▲ 책의 표지 <직접민주주의의 초대>의 표지
ⓒ 리북

가이드북은 직접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삶에 어떻게 융해되어 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취리히에 사는 '아스트리드'라는 여성의 삶을 소개한다.

그는 2003년 한 해 동안 여섯 번의 선거와 서른 건이 넘는 안건에 대해 투표로 의견을 표현한다. 2월에 주민투표가 있었고, 4월 5일에 주의회와 주정부의 선거가 있었다. 5월에 주민투표가 실시되었고, 10월에는 연방 상하의원 선거가 열렸다.

2월에 열린 주민투표에는 취리히주와 취리히시 등 지방정부 차원의 이슈도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시의 발전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지'와 '주정부가 철도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하는 안건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행정 책임자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로 익숙해진 것들인데.

2003년 5월 18일 일요일에 취리히 시에서는 연방정부 관련 9가지 사안과 주정부 관련 1개 사안, 지방정부 관련 2개 사안 등을 합해 총 12개 사안에 대해 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중 7개의 사안은 시민들이 직접 발의한 것이다. 유권자 한 명이 총 12개의 사안에 대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투표를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아스트리드는 이런 정치적 부담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는다.

안건이 모두 부결되어도 투표는 사회적 효력을 발생

이날 주민발의를 통해 투표에 상정된 7개 사안은 '비핵발전소', '핵발전소 건설 중단 연장', '장애인들에 대한 권리 보장', '연 4일의 차 없는 날', '건강보험', '적정한 집세', '청소년을 위한 보다 나은 직업훈련' 등이었다. 이들 사안에 대한 투표 결과, 유권자들은 7개 사안 모두를 압도적 차로 부결시켰다.

하지만 아무도 혼란이나 비용을 이유로 투표무용론을 제기하지 않고, 안건을 발의한 시민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시민발의와 주민투표를 거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토론이 있었고, 토론을 통해 시민들이 그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5월 18일 투표에 안건으로 제시된 '차 없는 일요일'의 경우를 보면 잘 감지할 수 있다. 이 법률은 '1년에 4일을 차 없는 일요일로 만들자'는 내용이었는데, 투표에서 유권자 37.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쳐 부결되었다. 하지만 스위스 사회는 이 37.8%의 지지를 놓고 "의회가 차 없는 일요일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투표로 과반수 동의를 얻지 못했다고 발의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윽박지르는 우리의 모습과는 차이가 크다.

유권자들은 의회의 입법이나 법 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 법률 개정에 대해 찬반을 묻는 '선택적 국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선택적 국민투표제'는 국민들에게 의회의 결정을 백지화시킬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정부와 의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중앙집중과 지방분권이 상호 조화를 이룬 스위스식 연방주의

스위스의 정부기관이나 선출된 정치인들이 시민을 존중하고, 동시에 민주적 절차들은 소수자를 보호하고 타협을 이끌어낸다. 이런 통합이 가능하게 하는 두 가지 기본 원리는 '직접민주주의'와 '연방주의'다.

연방헌법은 정부나 의회와 같은 국가 중심기관이 전반적으로 지침을 내리는 것을 허용하지만, 26개의 개별 주들이 스스로 원하는 대로 법적인 장치를 마려하도록 한다. 스위스 정부는 필요한 만큼 중앙집권화되어 있고, 필요한 만큼 지방 분권화되어 있다.

스위스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중에 상원은 20개 주가 크기에 상관없이 각 2명의 대표를, 6개주는 역사적 이유로 각 1명씩 대표를 파견한다. 각 주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이 의회에서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는 인구 규모에 상관없이 각 주가 동일한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반면, 하원은 국민을 대표한다. 인구가 밀집한 취리히주는 34명의 의원을, 인구가 가장 적은 위리주는 1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결과적으로 하원의 의원들은 제각각 일정수의 유권자를 대표하게 된다.

스위스의 양원은 각기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행사하고 의회의 결정은 양원이 모두 승인할 때만 효력을 갖는다. 상원이 각주의 의견을, 하원이 소속 유권자의 뜻을 대표하기 때문에 상원과 하원의 동등한 권리행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진정한 연방제가 실현되는 것이다.

스위스 직접민주주의는 "주권을 가진 것은 시민이고 입법자에게 필요한 기술은 입법 과정에 참여할 때만 얻어질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각종 연구의 결과도 "시민들의 참여의 기회가 크면 클수록 보다 풍부한 정보를 갖게 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스위스의 각종 경험은 "시민들이 입법자로서의 자질과 기술이 있는가"하는 질문이 그릇된 편견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주민소환운동 지난 여름 주민소환운동본부 관계자들이 김태환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를 발의하기 위해 선관위에 서명부를 제출하는 장면이다. '주민소환'과 '주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양대 축이다.
ⓒ 장태욱

스위스에서는 주민발의와 주민투표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행정비용과 캠페인 비용이 소모되고 있다. 그럼에도 2002년 '스위스기업인연합'은 "직접민주주의는 나라의 모든 부문, 모든 수준에서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백서를 발표했다. 이는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정치가 합의의 원칙에 근거를 둘 때 훨씬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주민발의와 주민투표에 드는 비용을 이유로 주민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려 하는 우리네 현실과는 너무도 차이가 크다.

지난번 하남시장이나 제주지사에 대한 주민소환운동 경험은 대의제의 병폐는 물론이거니와, 직접민주주의로 나가는 과정에서 겪게 될 숱한 난관들을 예상하게 했다. 부패한 정치 기득권 세력들에게 대의제야말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양분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아주 작은 단위에서부터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고자 하는 시민들의 각성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국가적 범위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은 그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의지가 선행되고 난 다음의 일일 것이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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