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시절 '애증'을 함께 했던 '맥내브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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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의 뉴욕통신] 모슬포 미군기지 반환을 환영하면서...

나는 소위 '해방공간'에서 모슬봉 바로 앞에서 태어났다. 아직도 내가 태어난 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해방을 맞이하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제침략후 빼앗겼던 우리의 소중한 농지가 우리 손에 되돌아 온다는 것...그리고 실제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나를 애기구덕에 놓고 짊어지고 그 밭으로 열심히 농사하러 다녔다.

그 기쁨은 잠깐...미군들이 들어오면서 '징발'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징발 보상금은 수십년간 한푼도 없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는 군사기지로 영구화하면서 강제매각을 강요하였다. 그것도 일시불로 땅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10년상환 국채를 발행하여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받기를 거부했다. 언젠가는 그 땅이 군사기지로 가치가 없다고 할 때 자손에게라도 반환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불가항력으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원치않는 사유권을 박탈당한 셈이다. 모슬포 비행장, 소위 국유지라는 것도 그와 비슷하게 강탈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 국유지 원소유주에게 반환문제는 모슬포 지역 농민들에게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그 미군부대에는 나의 어릴적 친구였던 검둥이 미군병사가 있었다. 나는 그 미군부대에 가서 재미있게 놀았다. 하루는 시커먼 진흙같은 것으로 체워진 뚜껑이 열린 드럼통속에서 그 흙을 약간 떼어내어서 구슬을 만들 작정으로 손바닥에 넣어서 비볐다.

그런데 그 미국 흙은 우리동네 찰흙과는 비교가 안되게 찰졌다. 내 고사리손이 그만 검둥이 손이 되어버렸다. 웅덩이에 고인 빗물에 싯어봤으나 허사였다. 나는 그만 엉엉울고 말았다. 깜짝놀란 그 미군병사는 달려와서 내 손을 바라보고 껄껄웃었다. 그리고는 수도꼭지가 달린 또 다른 드럼통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물'을 틀어주면서 씻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 물이 얼마나 신기스러웠던지...미국놈들의 흙과 물은 우리 것과는 영딴판이었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때에는 모슬포 천사보육원 원생들과 함께 특별초대를 받고 가서 미군들의 식당에서 푸짐한 대접도 받았다. 식탁가운데 놓인 닭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미군들은 키도 우리보다 두배는 되는 것같았는데, 거기 놓인 닭도 우리동네 닭보다는 몇배나 커 보였다. 진짜로 맛없는 닭고기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칠면조였다는 것을. 서부활극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속에서는 미국본토 원주민들과 카우보이(황야의 무법자)들이 죽이기 게임을 하는 그런 것이었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어른들은 저렇게 잔인한 게임을 왜 하면서 즐기는지?

좀더 커서는 미군들 친구가 많아졌다. 나는 그들을 학교에 불러와서 영어시간에는 녹음기 대신 활용을 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남들보다 영어를 많이 배웠고 좋아했다. 그래서 미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모슬봉 앞에서 쇠태우리를 하면서 수평선 너머로 지나다니는 엄청나게 큰 상선들을 수없이 보았다. '아, 언젠가는 나도 저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야지' 어렴풋한 꿈도 꾸었다. 그런 꿈은 20년이 지난 후에 이뤄졌다.

제주가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군부대는 떠나야 한다. 모슬포에는 미군뿐만 아니라 공군 그리고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다.

해병대는 특히 모슬포 섯알오름에서 백조일손 학살사건을 주도한 최일선 부대였다.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서 모슬포의 맥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긴 하지만...1948년 육군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허욱대위가 대대장으로 김상화 대정면장을 비롯해서 유지들을 잡아가두고 고문하고 학살하던 곳이다. 특히 특공대 12인 학살사건도 그에 의해서 일어난 대사건이다.

그 허씨가 주둔하고 있는 동안 모슬포 허씨들이 득세를 했다는 설이 나중에 자료를 보고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대정면사무소 '사령원부'에 엄연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니...[김상화 면장은 15년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형중 1950년 7월 아군에 의해 총살되고 암매장되었다, 그 동생 김우필씨는 영락리 도꼬못(속칭) 근처에서 총살당했다.]

나는 2003년 3월 해병대 모슬포 부대장(1950년 7~8월)이었던 김윤근을 찾아가서 '회개'를 촉구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가지고 백조일손 공동묘역을 방문하겠다 약속해 놓고 '인민재판'이 두려워서 못 온다고 했다. 여태껏 그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

해병대 사령부는 그 암울했던 과거사를 유족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물론 국방부도 정부도...'과거'를 털고 가야한다.

이제 해방 60주년을 맞는 회년에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놓임받는, 그리고 진정한 참회가 일어나고, 또 용서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는 그런 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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