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경의 일본야구 A to Z] 치바 롯데 마린즈

치바 롯데 마린즈(千葉(ちば)ロッテマリ―ンズ,Chiba Lotte Marines)
·홈 구장 : 치바 롯데 마린즈 스타디움
·본거지 : 치바 현(東京 바로 옆에 있는 현)
·오너 기업 :롯데(한국의 롯데와 같은 계열)
·퍼시픽 리그 소속. 리그 우승 5회, 일본 챔피언 3회
·창단 1950년

1949년 가을, 마이니치(每日)신문은 프로야구 구단 '마이니치 오리온즈'를 창단 했다. 창단 1년째에 리그 우승 및 일본 챔피언이 되는 등 아주 잘 나갈 것처럼 보였다. 1957년 '다이에이(大映) 유니온스'와 대등 합병, '마이니치 다이에이(每日大映) 오리온즈' 가 되는가 하면 1964년에는 '도쿄(東京) 오리온즈'가 되었다. 1969년에 롯데가 자금 스폰서가 되면서, '롯데 오리온스'가 되고, 1971년에 롯데가 구단을 장악하게 된다. 1991년에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름도 개칭하고, 구장도 '치바 마린스 스타디움'으로 옮겨서, 창단 40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프로야구 구단다운 구단이 됐다.

일본 롯데는 한국 롯데와 같은 계열이고, 한국 롯데 그룹 회장과 일본 롯데 그룹 회장은 한 사람이다(한국이름: 신격호). 그룹 이름도 '롯데' 한국과 일본이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한국과 또 재일동포들과 인연이 깊다.

역대 감독으로 재일동포가 제일 많은 구단이다. 가네다(金田, 한국이름:김경홍)감독, 아리도(有藤, 한국이름:김유세)감독이 우리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것은 누구도 다 아는 사실이다. 또 한국 선수도 많은 신세를 진 구단이다. 한국프로야구 일본프로야구의 원로 장훈 선배가 이 구단에 있었으며 한국 프로야구의 중진 백인천 감독이 이 구단에 있었고 이승엽 선수도 지금의 쟈이안트 巨人에 가기 전에 이 구단에 있었다.

▲ 롯데 회장 신격호 ⓒ제주의소리
그룹 회장 신격호(辛格浩, 일본 이름:시게미쓰 다께오 重光 武雄)는 1922년 한국 울산에서 출생했다. 해방 전 194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를 졸업, 1948년 일본 롯데를 창설했다. 일본이라는 외국에서 혈혈단신 맨주먹으로 기업을 만들고 키워 올려 그룹 매출액이 4천5백억 엔을 능가해 일본과 세계에서 유명한 기업을 만든 사람이다.

1960년대 한국 경제가 어려웠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한국 진출의 의뢰를 받고서 한국에서 창업한 기업이 지금의 한국 롯데이며 그 후에 생겨난 구단이 한국 프로야구 '롯데'이다.

일본및 한국의 '롯데'의 오너는 당연히 신격호씨다. 일본 롯데는 본인을 대신해서 둘째 아들이 '오너대행'을 하고 있으며 한국 롯데는 5촌조카에게 '오너대행'을 맡기고 있다.

롯데 감독을 했던 아리도(有藤, 김유세)감독은 '미스터 롯데'라고 불린다. 롯데 선수에서 롯데 감독까지 오로지 롯데에서 활동 했다. 1946년생으로 롯데에서는 명 3루수였다. 발 빠르고, 수비 잘하고, 안타를 잘 치는 명선수로서 평판이 자자한 선수였다.

그에게는 유명한 쓰라린 과거가 있다. 1964년 고등학교(고치고교, 高知高校)선수로 고시엔(甲子園)여름대회에 4번타자로 출전을 했다. 첫 경기 첫 타석 때, 상대 투수로부터 데드볼을 얼굴에 맞아서 이빨이 3개나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결국 그 고시엔대회는 병원입원 신세로 끝내고 말았다.

1968년에 롯데 입단, 1986년까지 18년간 롯데 선수를 하면서 신인왕, 수위타자 한 번, 베스트나인 10번, 또 야구인의 명예인 2천안타(2057안타)를 달성하는 등 선수로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미스터 롯데'의 칭호를 듣게 되었다.

은퇴한 다음 해인 1987년부터 3년간 롯데 감독을 했다. 감독으로서는 퍼시픽리그 6개 구단 중에 5위 6위를 하는 등 꼴찌에서 맴돌고 말았다.

▲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경홍) ⓒ제주의소리
롯데 감독을 했던 가네다 마사이치(金田 正一, 한국이름:김경홍 金慶弘) 는 '미스터 일본 프로야구'라고 불러야 될 사람이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타자로서 나가시마(長嶋) 왕정치(王貞治)가 있다면, 투수로서 가네다(金田)가 있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기록, 400승(400승 298패)을 올린 사람이다.

1933년 출생했으며 왼손 투수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를 중퇴하고 17살때 고쿠테쓰 스와로즈(國鐵スワロ―ズ, 현재 야쿠르트)에 시즌 중간에 입단했다. 고시엔 본선을 위한 지방예선에서 지고 말았다. 그래서 바로 프로야구와 계약, 프로선수가 돼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릴때 돌맹이로 전기 전선줄에 앉아있는 새를 맞출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고 빠른 볼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전쟁이 바로 끝난 후의 1950년, 당시의 우리 재일동포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말 그대로 처참하다는 말만 가지고 표현이 가능할까? 가네다 선수의 아버지는 말이 마차를 미는, 그 마차로 물건을 운반하는 마차꾼이었다. 옛날 서울에 있었던 지게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조센진. 성장과정에서 모든 차별과 가난에서 오는 피눈물을 경험했다. 가난 때문에 형제들의 죽움도 지켜보아야만 했다. 프로로 입단하면서 받은 계약금은 50만엔. 그 돈으로 아버지에게 중고 트럭을 사 드려서, 마차꾼이 아닌 운송업자가 되게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을 어제 중퇴한 어리디 어린 애송이가, 날고 기는 선수들이 득실득실한 프로야구에 가더니만 곧 승리투수가 된다. 시즌 중반에 입단한 애송이가 그해(1950년) 8승을 올리더니만, 다음해(1951년) 또 다음해도 20승이상을 올려, 일약 스타가 되는 것 아닌가. 다음해라고 했던들 남들은 고등학교 3학년 이다.

1950년에 입단 8승, 다음해 1951부터 14년간을 20승 이상을 올리는 괴물투수가 된다. 특히 그의 특기는 강속수에 커브였다고 한다. 1965년 우승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고 하면서, 우승할수 있는 구단 자이안트 巨人으로 이적, 쟈이안트에서 5년간을 활동한 뒤, 20년간의 선수를 은퇴했다.

유명투수로서는 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탈삼진을 잘 잡는 투수로도, 또 젊었을 때는 볼 컨트롤이 나빠 폭투를 잘하는 투수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투수의 명예인 탈삼진 일본기록도 가지고 있지만, 투수의 불명예인 4구(포볼)의 일본 기록도 있다.

▲ ⓒ자바 롯데 마린즈 사이트

달리는 런닝을 엄청 많이 하는 선수로도 유명했다. 고등학교 때, '투수는 손으로 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하체로 볼을 던진다' 는 감독의 명령을 프로에 와서도 철저하게 잘 지킨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그저 멍청하게 달리기만 하는 선수로 보였다고 한다.

잘 먹기로도 유명했다. 운동선수는 우선 잘 먹는 것부터, 라며 대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우리 한국음식인 삼계탕 김치치게, 특히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준 삼계탕 김치찌게는 운동선수에게 최고라며 동료들에게도 권했다. 맛과 효험을 알게된 동료들이 이젠 조리법을 배워달라고 졸랐다는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그는 1973년부터 6년간 롯데 감독을 했다. 그간에 리그 우승 및 일본 챔피언도 했다. 그후 아리도(有藤, 김유세)감독 다음으로 1990년, 91년 2년간을 다시 롯데 감독직을 역임 했지만 2년간 5위 6위로 꼴찌를 면치 못했다.

감독을 할 때 그의 모습은 성질 나쁜 한국 아저씨, 바로 그 모습이었다. 퍽하면 뛰어나가 심판과 싸움을 하는가 하면,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상대팀 선수가 넘어져 있는데, 그 선수 머리를 감독이 발로 차려고 했던 것. 선수도 아닌 감독이 상대 선수의 머리를 발로 차다니. 후에 유명한 말을 해서 웃음을 만들었다. '내가 발을 올렸더니 그 선수 머리가 발아래에 있었다.'

지금도 그는 일본 프로야구의 어른이다. 타자로서는 2천안타 이상을 쳐야만, 또 투수는 200승 이상을 올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일본프로야구 명구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나가시마(長嶋) 감독과 왕정치(王貞治) 감독은 부회장이다.

▲ ⓒ자바 롯데 마린즈 사이트

일본 '롯데'라 하면 어지간히도 못하는 구단으로 유명했다. 1998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기록에도 남아있는 18연패를 기록하는 등 매년 꼴지 구단이고, 특징이 없는 구단으로 도 유명하다. 1980년대 90년대는 관객동원수도 6개 구단 중 매년 꼴치였다.

그런 기간중에서도 오치아이 히로미스(落合 博滿, 현재 쥬니치(中日)드레곤스 감독)가 1979년부터 1986년까지 8년간 롯데 있으면서, 타율 타점 홈런의 삼관왕을 3번이나 했다. 그의 삼관왕 3번은 일본기록이다. 그 유명한 왕정치(王貞治)감독이 2번, 노무라(野村)감독이 1번을 한 삼관왕을 오치아이 감독은 3번을 한 것이다. 그가 롯데에 있으면서 개인은 좋은 성적을 올려지만, 팀은 항상 밑에서 맴돌았다.

이런 별볼일 없는 구단이 최근 들어서 활약을 좀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영향은 명물 감독이 들어와서 부터다. 보비 바렌타인(Bobby Valentine, 1950년생) 감독이다. 미국인으로 메이저 리그 선수였다. 선수로서는 10년을 했지만 그리 대단한 성적은 없었다.

미국 메이져 리그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s)'에서 8년간 감독, 1995년에 일본 롯데로 왔다. 1년간 감독을 한 후, 롯데의 제너럴 메니져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미국에 가서는 바로 '뉴욕 메츠(New York Mets)' 감독을 하더니만, 2004년에 다시 일본 롯데로 와서는 2009년까지 감독을 했다. 그사이 2005년은 일본 챔피언까지 해냈다. 만년 꼴찌 팀을 일본 챔피언까지 올려 놓았으니, 할 일은 한 감독이다.

격정적인 미국 사람이란 인상이다. 부리부리한 눈에 무언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달려가 항의하고 싸움도 아주 잘 했다. 일반 팬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너무 인상에 남았다.

▲ ⓒ자바 롯데 마린즈 사이트

본인이 선수를 했을 때는 부상으로 너무 빛을 보지 못한 선수였다. 그래서 감독으로서 자기 팀의 선수들의 부상에는 아주 민감하게 선수를 돌보며, 무리를 시키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밖에 나가서 심판들과 싸음은 할지언정 절대로 선수들을 책망하지 않는 감독이다. 팀이 연패를 할 때도 항상 선수들을 치켜 올려세우는 자세이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웃지 않는 감독으로도 유명했다. 역전을 했다해도 경기도중이라면 절대로 웃는 모습이 없는 것이다. '감독이 웃음을 보이면 선수들이 정신이 해이해져 그 경기는 끝났다' 라고 말하고 있다. 경기가 끝나서야 웃으면서 선수를 대하는 것이다. 미국 야구의 구석구석을 일본에 도입 한 감독이다.

야구 이외에서도 여러가지 재미있는 모습을 보였다. Best Dress상(그해에 가장 옷을 잘 있는 사람)에 뽑히기도 했다. 그의 말버릇 '프로야구는 팬이 있어서 존재'한다며  팬들에게 다가가는 감독이기도 했다.

2009년에 그가 롯데 감독을 그만두는 그 과정 또한 이상했다. 2009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2008년 년말에 바렌타인 감독은 올해만 하고서 그만둔다, 라는 발표를 구단에서 했다. 아니, 시즌은 지금 시작도 하기 전. 이제 선수들의 훈련에 들어갈 때. 이 때 감독을 그만두게 하다니, 선수 누가 감독의 말을 듣고 훈련을 할 것이며, 시즌 시작 후 경기에 임하면서 감독의 명령을 들을 것인가. 그래서 롯데 팬들이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바렌타인 감독을 더 하게 하라는 서명운동인 것이다. 11만명의 서명을 받아들여 구단에서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으로서 바렌타인 감독은 감독을 그만둔다. 2009년이 끝난 지금, 일본 프로야구는 인사이동도 많은 오프가 시작 되었다. <제주의소리>

<신재경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