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오승국 - 한 세기만에 외군기지 없는 평화의 섬으로(1)

▲ 맥내브 기지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
주한미군사령부는 지난 3월 11일 한미연합사 토지관리계획의 일환으로 제주 대정읍에 있는 미군휴양시설인 캠프 맥내브 기지를 오는 21일부로 한국정부에 반환할 방침이라고 밝힘으로서 반세기만에 미군기지가 없는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는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는 또한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래 일경과 일군이 제주도에 들어온 이후를 생각한다면 근 백년만에 외국군이 없이 섬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오승국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이 맥내브 미군기지의 역사와 임무 그동안의 상황과 전략 등을 정리하여 원고를 보내왔다. 시인이기도 한 필자는 1992년 르포“성조기 나부끼는 잠들지 않는 남도”란 글을 당시 발행되었던 “월간제주”에 발표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편집자 주]

모슬포, 들불처럼 타오르는 함성으로 제주 근·현대사에 찬란한 민중항쟁의 역사를 낳았던 눈물과 설움의 땅이다. 우리나라의 최남단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 팍팍한 땅에 밤이 깃들면 모슬봉 정상의 레이다 기지와 맥내브 미군기지의 주변에는 나트륨 보안등이 환히 켜진다.

모슬포 시내의 꾀죄죄한 수은등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슬봉 정상의 레이다는 우리 이웃들의 들풀같은 삶을 내려다보며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잠들지 않는 남도. 한국 현대사의 해방공간에서 서슬퍼런 미군정에 대항하여 반외세 자주화 운동의 기치를 높이 올린 4·3항쟁의 고향에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성조기를 나부껴 온 미군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지난 3월 11일 한미연합사 토지관리계획의 일환으로 제주 대정읍에 있는 미군휴양시설인 캠프 맥내브 기지를 오는 21일부로 한국정부에 반환할 방침이라고 밝힘으로서 반세기만에 미군기지가 없는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는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는 또한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래 일경과 일군이 제주도에 들어온 이후를 생각한다면 근 백년만에 외국군이 없이 섬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에 소재한 맥내브 기지의 반환은 사실 지난 2002년 우리 정부와 미국의 맺은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Land Partnership Plan) 시 맥내브 기지를 포함한 한국내 미군기지 28곳과 훈련장 전부 혹은 일부를 한국정부에 반환하도록 한 협정 때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기지로 쓰이다가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에는 4·3항쟁을 토벌한 국방경비대 9연대의 기지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정지역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면서 미군 군사고문단이 내려와 사용하기 시작한 맥내브 기지는 제주도의 굴곡된 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미군 기지와 모슬봉 레이더기지.
# 민중항쟁의 고향이자 자주독립·조국통일의 열기가 서린 모슬포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었고 해방 직후에도 민족운동가들이 이 땅의 자주독립·조국통일 운동에 열을 쏟았던 이곳 대정 지역.

이보다 훨씬 이전에도 방성칠·강제검·이재수 등이 압제에 저항하여 장두정신을 낳게 했던 민중항쟁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반외세 자주화의 고향 모슬포에 지금도 우리 현대사의 모순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의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때 한반도의 끝 제주지역에서는 송악산 군사기지 반대투쟁이 들불처럼 일어섰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이때 군사기지 반대투쟁 시위대의 행진이 맥내브 미군기지 정문 앞까지 가서 연좌농성을 벌였던 일은 이 지역 주민들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일이었다.

송악산 지구 관광지 개발이 갑자기 백지화되고 거대한 규모의 알뜨르 군비행장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대정지역과 온 도민은 군비행장 결사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완강한 투쟁을 벌인 결과, 결국은 국무총리실에서 송악산 군사기지 전면 백지화를 발표함으로써 일시적 승리를 거둔 귀중한 경험이 있다.

# 일제에 의한 중국내륙 침략 전초기지로 전락한 송악산

대정지역은 제주도 서남쪽에 위치하여 국토의 최남단인 마라도와 가파도의 길목역할을 하고 있으며 최근 제주 서부의 거점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정현청이 있었던 명망보다는 모슬포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최근까지 해군·해병·공군·미군 3개의 군사기지가 주둔했던 이곳은 압제에 저항했던 민란의 전통과 한국전쟁 때에는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하여 구국의 혼을 불살랐던 군사지역으로서 성격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지역은 특이한 형태의 기생화산들이 여기저기 둘러있는 평원지대이기도 하며, 바람이 모질게 불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절박함이 베어있는 농경문화가 일찍부터 싹트기도 하였다. 국토의 남쪽 끝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슬포의 역사는 제주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질곡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 낸 선진문화의 고향이다.

돌아보면, 모슬포 지역은 외세와 중앙정부에 의해 일제시대부터 군사기지가 들어선 곳이다. 일제는 1930년대 중국대륙 침략을 겨냥한 전초기지로 송악산 일대를 일찌감치 선정하여 강제로 토지를 수용한 후 전 도민을 대상으로 한 강제징용으로 송악산 일대를 그들의 군사기지로 건설했다. 지금도 알뜨르에는 당시의 활주로와 탄약고 등이 흔적으로 남아있어 식민지시대의 서러움을 느끼게 한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이곳에 제1훈련소가 설치되면서 정부는 이 지역의 땅을 몇 푼의 보상만으로 징발하여 전쟁이 끝난 후 지금까지도 군부대가 계속 눌러 앉아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말기에는 중앙관리에 의해, 일제시대에는 외세에 의해, 해방 이후에는 미군과 중앙정부에 의해 수탈과 착취를 당해 온 모슬포 사람들이었기에 유달리 자주의식이 강한 면을 엿볼 수 있다.

▲ 맥내브 기지는 우리나라 공군 부대와 같은 위병소를 쓰고 있다.
# 1953년 캐미지 부대로 출발, 한때 150명 주둔…영군 공군기까지 이용

제주섬을 돌아가며 어디서든 보는 한라산도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지만 모슬포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또한 색다르다. 안개에 휩싸인 모슬봉과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송악산의 고결한 모습, 신이 빚어낸 것 같은 웅장한 조각미의 멋스러움으로 우뚝 솟아있는 산방산의 용맹스런 태깔, 불완전의 아쉬움을 주는 단산봉, 그 뒤에 어머니의 인자한 모습으로 높게 솟아오른 한라산의 수려한 자태가 함께 어우러져 가서 가히 모슬포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기막힌 황홀경을 연출해 낸다.

이처럼 풍광이 수려한 역사의 고향에 늘 성조기가 나부끼는 미군기지가 모슬봉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자주의식을 사랑했던 모슬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아프게 다가왔던 것이다.

모슬포에 있는 맥내브 미군기지의 역사는 제주의 현대사속에 개입하게 되는 외세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제주의 어느 지역보다 비옥하고 드넓은 농토인 송악산 알뜨르 지역은 일제시대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거대한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일제는 사유지였던 이곳을 강제수용하여 비행장 활주로 등을 건설했고, 해방 이후 토지개혁 때도 이 일대는 국유지(국방부)로 묶여 버렸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1훈련소 설치와 함께 미 제5공군 군사고문단이 주둔하여 알뜨르 비행장을 사용했으며 53년도에서 58년도까지는 맥내브 대령이 지휘하에 케미지(KAMG)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1958년도에서 73년도까지는 본격적으로 레이다를 설치하여 영국 공군기까지 사용할 정도로 기지의 활용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근무병력수도 150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 레이다 기지를 모슬봉 정상에 최신 시스템으로 이전하고 한국 공군과의 협조 속에서 관리하고 있다.

현재 모슬봉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기지 멕내브는 미2사단 소속에서 미8군으로 편재되어 8군과 2사단 군인들이 교대로 찾아와 유격 훈련장으로 쓰이다가 90년대 중반부터는 유격훈련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미군들이 휴양소로 사용되어 왔다. - 2부 계속
오승국(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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