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직의 현지르포] 스리랑카 쓰나미 피해지역 봉사를 다녀와서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때린 것이 벌써 지난해 12월26일이니까 벌써 석 달째로 접어 들고 매스컴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는데 이제야 가는 것이 쓰나미 피해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도 있었고 몇 푼 안 되는 모금액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걱정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쓰나미 직후 제주외국인근로자센터에서는 제주시청 만남의 광장에서 추모 집회와 모금 활동을 통해 300여만원의 구호금을 모았고 이 돈을 공동모금회에 그냥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돈이지만 우리가 직접 현장에 가서 전달하면서 우리 눈으로 그들의 피해를 확인하고 상처라도 어루만져주면서 아픔을 나누어 보자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짧은 준비 기간과 부족한 비용으로 참가자들의 비행기 표는 본인이 물론 준비를 했고 많은 구호물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500명 정도를 진료할 수 있는 약품과 함께 쓰나미 피해자 가운데 가장 심하게 정신적 충격을 입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긴급하게 필요한 것 중에 하나라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위한 놀이 기구와 학용품을 준비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구호 팀원 중에 유치원 원장님과 소아 심리학과 놀이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제주대학 교수님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제주에서 3월8일 아침 9시40분 비행기를 탄 우리들은 인천-싱가포르를 경유해 다음날 0시35분경 스리랑카의 콤롬보 공항에 닿았고 공항에 준비된 버스를 바꿔 타고 우리의 목적지 트리코빌이라는 쓰나미 피해가 가장 심했던 스리랑카 동남부 해안의 작은 마을에 도착 한 것이 9일 오후 6시경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제주에서 출발해 현장에 가는 시간만 도합 40여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물론 여행이 길어진 데는 도중에 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부의 바티칼로아라는 도시에서 트리코빌까지 2시간 거리를 남겨 놓고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도로가 봉쇄되어 모르는 길을 둘러 가느라 서너 시간이 허비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도로 봉쇄 사건은 사실 몇 백년 스리랑카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스리랑카는 단일 종족이 아니고 두 종족이 한 나라를 이루면서도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 왔었다고 합니다. 아리안계인 싱할라인들은 서남쪽을 주로 차지하고 불교가 주 종교였고 드라비다계의 타밀족은 힌두교나 이슬람이 주종교로 동북쪽을 차지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도 서로 전혀 통하지 않는 언어 싱할라어와 타밀어였습니다.
가장 피해는 크면서 정부의 지원이나 국제 NGO의 물자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동 남부 지역의 작은 마을 트르코빌을 우리에게 권유하여 오가는 길에 고생은 좀 하였지만 더 의미 있는 여행과 봉사활동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매스컴에서는 쓰나미라는 단어 조차 사라져 가고 있지만
쓰나미의 현장은 피해 당시 그 상황 거의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시체만 치워졌을 뿐 난민들은 난민 캠프 촌에서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틀 동안 약 300 명가량의 환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부는 쓰나미 당시 몸에 상처를 입은 환자들이었고
대다수 호흡기 질환 환자들이 많았으며 길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다 보니까 발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다행히도 외국의 여러 NGO 의료 지원팀이 다녀가 급환은 비교적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번 쓰나미로 스리랑카에 지원한 나라 중 지원액으로 따져서는 한국이 일등은 아니었지만 자원 봉사자 수로는 단연 한국인이 가장 많이 다녀갔을 거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이번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정부차원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보낼 계획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몇 칠 스리랑카에 머무는 동안 어디에서도 다투는 사람을 한사람도 본적이 없었고 어느 누구도 생활의 어려움으로 괴로워 죽고 싶다거나
형제와 부모 부인과 자식을 잃고도 생을 비관하여 자살 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행복 지수는 살만한 우리 보다 훨씬 높아 보였습니다.
쓰나미에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어느 아주머니는
붕대로 부러진 다리를 감고 소똥과 허브를 함께 개어
기브스처럼 하고 나타나서는 통증이 아직 좀 있으니 진통제를 좀 달라면서도 연신 미소와 함께 여유를 보였습니다.
암 환자도 거의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평소 먹는 우물은 다 오염이 되어
식수는 외국 NGO들이 설치한 대형 정수 시설을 통해 만들이 진 물이
동네 여기 저기 설치된 물탱크를 통하여 공급되고 있었으나 외국인들은 생수를 사서 먹는 것이 안전 할 것이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쓰나미 후에 전염병이 돌 수 도 있을 것이라는 외국 언론들의 우려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쓰나미 피해 지원 차 스리랑카 정부가 외국에서 받은 엄청난 지원금으로 정치가들이 떼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엄마, 아빠라는 타밀어가 한국어와 발음과 뜻이 똑 같아
가끔 우리가 착각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남편을 부를 때도 ‘아빠’라고 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떠나던 날 최고의 대접이라고
이구아나 고기를 그들로부터 대접 받았습니다
자기들도 일 년에 한번 정도 먹을 까 말까한
귀한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제주의 하늘 물과 공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사람들이 나누는 기쁨을 알 정도로 살 만해 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 사는 정도면 돈 때문에 경제 때문에 환경을 포기하고
생명을 져 버리는 일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쓰나미는 지금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홍성직(제주외국인근로자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