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사람 사는 세상] 회사에서 하루 동안 함께 한 아들

3월이 되면서 아들 원재도 이제껏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반이 바뀌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보낸 가정통신문을 찬찬히 보다 생각하지도 않은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3월 3일이 어린이집 입학식인데 끝난 후에는 수업이 없으니 이점 양지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느덧 아들이 여섯 살이 되어 유채반에서 새별반으로 반 이름도 바뀌고 선생님도 바뀌어서 '이렇게 컸구나'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뿌듯하던 차였습니다. 작년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그때도 입학식 날에는 수업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작년에는 공익근무를 하는 조카가 낮에는 집에 있어서 아들을 돌봐줬던 것 같습니다.

서둘러 입학식 하루 동안 아들을 돌봐줄 이를 구하는데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누나들도 다 직장을 다니고 집에서 대학을 다니는 여동생도 수강 신청을 최종적으로 변경하러 학교에 간다고 하니 괜히 조바심이 났습니다.

제가 어릴 적 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금이라도 수업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는데 제가 아버지가 되고 보니 당장 애 맡길 곳을 찾느라 애를 먹게 되는군요. 백일을 갓 넘긴 우리 딸아이(지운이)를 봐주는 처남댁에 전화했더니 시골에 다녀와야 된다며 지운이와 아들 둘을 다 데리고 가기에는 혼자 버겁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고민 끝에 제가 아들을 데리고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가끔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 한두 시간 정도 회사에 같이 있던 적은 있었지만 하루 종일 같이 있던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도 아내의 회사로 가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눈치를 덜 보는 제가 데리고 있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 원재에게 그림 그리라고 했더니 로봇만 잔뜩 그립니다. ⓒ2005 강충민
 
일단은 제 자리 옆 의자에 아들을 앉혔습니다. 그리고는 떠들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했습니다. 급히 나오느라 아들의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갖고 오지 못해서 A4용지를 여러 장 겹쳐서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사인펜과 매직을 주고 거기에다 그림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사무실에서 팀장이어도 직원들 눈치가 보였습니다. 괜히 주눅도 들었고 혹시라도 떼를 쓰고 울지나 않을까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자위하면서 그렇게 아들을 제자리 옆에 앉히고는 아들의 동태를 계속 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꽤 의젓하게 제가 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다 말고 아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아빠! 아빠가 사무실에서 대장이야?"

저는 여행 문의에 대해서 전화 통화를 하던 중이라 혹시 그 소리가 전화기 저편 고객에게 들릴까 재빨리 수화기를 막고 "쉿" 했습니다. 아들도 엉겁결에 따라 "쉿" 하면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대장은 아니고 팀장이야."

전화기를 내려 놓고 대답을 하는데 아들이 저를 바라보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다 얘기합니다.

"그렇구나. 대장 아니구나... 원재는 아빠가 대장인 줄 알았는데..."

팀장과 대장의 의미를 정말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통에 사무실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혼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싫증이 났는지 원재는 계속 "아빠 심심해..." 했습니다. 어느새 제가 준 A4용지도 다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빠 밖에 나가도 돼?"하고 묻는데 제가 "안 돼!"하니까 조금 시무룩해 하더니 금세 다른 직원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항공 업무를 보는 여직원 옆에 가서는 "비행기 타 봤어요?"하고 묻고는 "원재는 작년에 일본 갔다 왔는데... 큰 아빠에게..." 합니다. 아들이 얘기하는 큰 아빠는 저하고 가장 친한 저희 대학 교수님입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점심 시간이 되니 직원들하고 둘러앉아 점심도 같이 먹었습니다. 제가 직원들에게 조금 미안해서 아구찜을 배달시켰습니다. 아들은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콩나물을 씩씩하게 먹고는 좀 전에 친해진 항공 담당 여직원에게 말을 겁니다.

"이모! 콩나물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여직원이 "어떻게 되는데?" 되물으니 한마디 합니다.

"똥 잘 나와."

또 다시 점심을 먹다 말고 모두 자지러지게 웃었습니다.

   
 
▲ 점심시간이 되자 원재도 다른 직원들 틈에 끼어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집에서보다 더 씩씩하게 많이 먹었습니다. ⓒ2005 강충민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제가 여러 개의 낱말을 쓰고는 그걸 따라서 쓰라고 했습니다. 한 장에 한 낱말을 일곱 번씩 쓰면 아직 한글을 확실히 모르는 아들이 다 따라 쓰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리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반 정도를 썼는지 삼십분 정도 있었는데 아들을 살짝 보니 아주 많이 무료한 모양입니다. 졸린지 하품도 했습니다.

   
 
▲ 무료한가 봅니다. 제가 원재에게 "뭐해?"했더니 원재가 "그냥 생각해"했습니다. 원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2005 강충민
 
오후에는 단체여행 오신 할머니들을 배웅하러 공항에도 갔다 와야 되고 항공사 제주지점에도 다녀와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데리고 공항에 나갔습니다. 할머니들에게 여행 잘하셨냐고 인사드리는데 아들도 씩씩하게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안녕하세요?" 인사했습니다. 한 할머님이 주신 천원짜리 지폐를 저에게 주며 "아빠 보관이야" 한마디 합니다.

할머님들을 배웅하고 다시 항공사 제주지점으로 갔습니다. 아들은 처음으로 회전문을 보았습니다. 한 번 회전문을 통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야, 재미있다" 합니다.

아들을 데리고 항공사 지점으로 가니 항공사 직원들이 다들 한마디씩 합니다. 솔직히 창피했습니다. 저희 여행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서랍에서 초콜릿을 꺼내 아들에게 줬습니다. 아들은 받은 초콜릿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담았습니다. 항공사 직원이 아들에게 "원재야, 초콜릿 먹어" 하니까 아들은 씩씩하게 한마디 합니다. "초콜릿 먹은 다음에는 양치해야 되는데 원재 지금 칫솔 없어요..." 합니다. 그렇게 항공사 직원들을 또 한바탕 웃겼습니다. 괜히 우쭐해졌습니다.

   
 
▲ 항공사 제주지점 앞에서 찍었습니다. 원재는 회전문을 참 재미있어 합니다. 손에 초콜릿과 그림 그린 종이를 꼭 쥐고 있습니다.ⓒ2005 강충민
 
사무실로 들어오니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다고 비로소 아들의 손을 잡고 회사를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 제가 고등학교 때던가요. 어떤 이유에선지 산맥 같던 아버지가 술을 한잔 드시고 들어온 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어깨가 한없이 초라하게 흔들린다고 느꼈는데 이제 저도 그 아버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 원재... 오늘 아빠의 회사에서 하루를 보내고 조금은 아빠가 하는 일을 이해했을까요? 이제 잠든 아들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뺨에 살며시 입맞춥니다. 뿌듯함이 밀려옵니다.  

※ 글쓴이가 직접 운영하는 제주관광안내사이트 강충민의 맛깔스런 제주여행( www.jeju1004.com)에도 올린 글입니다. 제가 올린 글이 어려운 시대에 조금이라도 따듯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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