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쳤어요] 한여름에 복대 차고 낑낑거린 사연

▲ 수술 자국 여섯살 난 우리 딸이 수술자국을 보고 "지네 같애"라고 했다가 "햇님 같애"라고 정정을 했습니다. 목욕탕에서 이런 자국이 있는 사람을 보면 왠지 반갑습니다. ⓒ 강충민 신장이식수술

누나는 오지 않았고, 나에겐 올 것이 왔다

인천에 사는 내 바로 위의 누나는 올해 설에 제주도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매형도 바로 옆 마을 사람이라 설날에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꼭 내려왔던 터였습니다.

누나는 같은 제주도사람이면서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인천에 자리를 잡은 매형과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 군대 있을 때라 청원휴가를 받아 참석했습니다. 연년생이어서 존댓말은 고사하고 여태 단 한 번도 누나라고 불러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누나가 신장이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누나는 둘째조카가 네 살 무렵에 신장이 안 좋다는 검진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몸 관리를 잘 하나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명절 음식을 마주 하고 술이 몇 잔 오가는데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매형에게 물었습니다.

못 내려온 당신 딸이 못내 아쉽고 걱정 되었겠지요.

"건이 어멍 경 안 좋으냐?" (건이 엄마 그렇게 안 좋으냐?)

"호루에 네 번 복막투석해야 되난 어디 먼디는 가지 못헙니다."

(하루에 네 번 복막투석해야 해서 어디 먼곳은 가지 못합니다.)

저는 순간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나 때문에 인터넷에서 신부전증을 검색하면서 얻게 된 얕은 지식에도 투석을 끝내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신장이식입니다. '누나에게 신장을 제공해야 할 사람은 나구나'라고 미리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B형인 혈액형이 그렇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할 때 내가 하는 것이 편할 듯싶었습니다. 그리고 왠지 조직도 제가 맞을 것 같았고요.

3일 만에 말문 연 각시 "나에게도 떼줬겠지...?"

설 연휴가 끝나고 근 한 달 동안 내 머릿속은 복잡했습니다. 솔직히 결심이 섰는데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둥둥 떠다녔습니다. 선뜻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는 말이 맞겠지요.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하지 못한다는 것을 십년을 같이 산 각시는 눈치로 알고 있었습니다. 삼월 첫 주말, 대체 무슨 고민이 있는지 저에게 털어놓을 것을 종용했습니다.

"나 선이에게 신장 떼어 줄게..."

제 말에 각시는 제 눈만 말똥말똥 바라보다 나중에 얘기하자며 안방으로 가더군요. 그리고는 그때부터 입을 닫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할 수도 없고.특히나 밤에 잠들기 전, 적막감은 참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각시는 만 3일이 지나 저녁을 끝낸 후  통닭과 맥주를 시켰습니다. 말없이 맥주를 두 잔 따르고 건배를 청하고 조금 뜸을 들이다 드디어 한 마디 했습니다.

"이건 만약인데... 내가 안 좋았으면 나에게도 떼줬겠지?"

질투였을까요. 아니지요.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임을 알기에, 뭐라도 하나 위안삼고 싶었겠지요. 각시도 당사자인 저 못지않게 생각이 복잡했겠지요.

"그럼 누나에게도 주는데 설마 각시에게 안 줬겠냐?"

그렇게 각시는 동의를 했고 우리 부부는 통닭을 뜯으며 맥주를 마셨습니다.(그런데 솔직히 순간 제 마음 한 구석에서는 각시가 '절대 안 돼' 했으면 했습니다. 참 간사하게도)

고통의 유효기간은 만 48시간

▲ 수술 전 검사용지 조직검사 후에 받은 심리테스트 검사용지입니다. 수많은 테스트 용지 중의 하나입니다. ⓒ 강충민

그 날 저녁 누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뜻밖의 전화에 누나는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하긴 다짜고짜 전화해서 "야 걱정하지 마, 내 꺼 떼줄게" 했으니까요.

다음 날부터 오히려 제가 서둘렀습니다. 누나나 매형의 입장에선, 기다렸다는 듯 저에게 절차를 얘기하고 그러기가 무척이나 미안할 거라 여겼으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건, 제 결심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제공자가 나왔다고 전하라 했고, 빠른 시일 내에 조직검사 날짜 일을 잡아달라고 했습니다. 누나와 제 조직이 맞아야 하고 또 제 몸에 다른  이상이 있다면 좋은 뜻으로만 끝나는 일이니까요.

4월 초순, 인천의 인하대학교 병원에서 첫 조직검사를 받는데 순간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제주도 촌년인 누나는 낯선 인천에 와서 무던히도 외로움을 탔었나 봅니다. 군대에 있던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그 외로움을  실토했지요. 지금도 생각나는 20년 전의 구절들...

"나 지금 여기 와 있다. 인천이라는 도시에.... 가끔 새벽에 깨서 뒤척이다 보면 내 옆에 낯선 남자가 누워있다. 그러다 알람을 누를 사이도 없이 미리 귀신처럼 일어나 좁은 부엌으로 향한다. 오늘 아침엔 무국을 끓일 요량이었다. 서툰 칼질에 그만 가운데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오른손으로 재빨리 중지를 감싸 안았는데 눈물이 나오더라. 날은 밝아 오는데 스르르 오른손을 놓아 버리고 그냥 울고 말았다. 나 여기 왜 와 있을까...."

참 묘하더군요. 20년이 지나 누나의 또 다른 외로움과 맞닥뜨리고 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이젠 저도 같이.

조직검사의 결과는 제가 예감한 대로 누나와 맞았습니다. 그리고도 수많은 검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제 몸의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는지... 정말 제 몸을 샅샅이 뒤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담, 심리테스트, 순수한 기증인지를 파악하는 인터뷰까지. 누나의 주치의인 김문재 교수님께서 제게 신장 제공자의 '갑종'(신체상태가 최적이라는 말, 군대용어)이라고 하시더군요. 뿌듯했습니다(주치의인 김 교수님이 제주도사람, 게다가 같은 효돈이라고 말씀하셔서 너무 놀라고 반가웠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6월 28일 인하대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드디어 7월 1일 아침 8시에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곧 잠들었습니다. 잠시 후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고 전 그렇게 물어봤습니다.

"걔는 요?"

"네 잘됐어요"라고 얘기를 들었고 병실로 옮겨졌습니다. 병실에 걸린 시계는 오후 세시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병실로 옮겨진 처음엔 전혀 아프지 않더군요. 조금 졸립고 힘이 없고 춥다는 느낌밖에는...

그런데 서서히 시간이 흐르자 고통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아픔이었습니다. 내 온몸을 많은 사람들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문하는 느낌이라면 적당할까요.

▲ 심리테스트의 문항 심리테스트의 수많은 문항 중 일부입니다. 어떤 용지는 500문항이어서 작성을 할 때 참 수고(?)가 많았습니다. ⓒ 강충민

솔직히 왜 내가 이 짓을 했나 후회가 됐습니다. 물론 수술하기 전에 상담하면서 아플 거라고, 그때마다 진통제를 투여한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고통을 미리 짐작할 수는 없으니까요. 병실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각시는 제 온 몸을 주무르며 계속 울었습니다(그때 각시는 자기 남편과 시누이가 그렇게 미웠답니다). 고통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니 조금 나아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죽을 것 같은 고통도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는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은 한결 나아졌고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자 '아 이젠 살 것 같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간만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확신이 있다는 건 새삼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엄살이 무척 심한 제가 죽을 것 같은 고통도 넉넉히 만 48시간이더군요.

헐! 내가 미담의 주인공이라고...?

▲ 얼마 동안 복대를 했습니다. 수술 후 얼마동안은 복대를 했습니다. 배를 조금 조여주는 것이 편했습니다. 여름철이라 길가다 복대가 드러날까 조심스러웠습니다. ⓒ 강충민

가스가 나오고, 식사를 시작하고, 병실 주위를 각시와 산책하면서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생겼습니다. 기분 좋은 일로  병원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그리고 제가 미리 맛본 고통이 다시 또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전가가 될 것이고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제 퇴원 후에도  평생 담배를 끊자.' (그러고 보니 25년 흡연입니다.)

아침 담당 주치의 회진시간이나, 복도 끝 휴게실에 가면 참 민망한 적이 많았습니다.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이나 주변 병실의 환자, 보호자 사이에서 전 아주 장한 일을 한 미담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남도 아닌 내 바로 위의 친누나인데 말입니다.

하나 남은 오른쪽 신장은 수술 후 이어지는 검사에서 무리 없이 적응한다고 했습니다. 누나도 수술 후 처음 중환자실을 거쳐 무균실로 옮겼고 아주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담당 교수님이 아주 경과가 좋다고 전해주셨고 그때마다 저의 노고(?)를 칭찬했습니다. 참 태어나서 이토록 많이 칭찬받아 본 적이 있었을까요.

누나의 병실로 각시와 놀러 가면 누나는 병실을 나와 휴게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저는 그 모습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뭐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지만….

드디어 저는 7월 10일 퇴원했습니다. 누나는 한 달 정도 있으면 퇴원한다고 했고요. 제주도로 내려가는 비행기 속에서 많은 생각이 났습니다. 입원 기간 내내 저보다 더 속이 쓰렸을 각시에게도 고마움과, 두고두고 살면서 갚으리라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한 편으론 여태 단 한 번도 누나라 부르지 않았던 저의 죄 값은 이제 조금은 사면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제 수술 후 6개월이 다 되갑니다. 그동안 저는 담배를 단 한 대도 피지 않았고 수술 전과 똑같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물론 가족들은 지금도 조심하라고 하지만...). 누나는 퇴원해서 점점 병원검사 횟수를 줄여가는 상황이고요.

만약 누가 신장 제공에 대해 물어온다면 "네 아무렇지 않아요. 떼주세요" 이렇게 권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지금 저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저는 지금 참 기분이 뿌듯하고 만약 주어야 할 상황이 다시 온다면 똑같은 결정을 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검사, 수술,입원기간동안 가끔 농담을 섞어가며 안심시켜주신 인하대 병원 신장내과 김문재선생님, 권수연 선생님, 비뇨기과 윤상민 선생님 12층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인하대병원 불교봉사회 무량심 회장님 이하 여러분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여름성수기에 오래 회사를 비워야 하는데도 선뜻 허락해주시고 걱정해주신 우리 회사 김영언 사장님께도 거듭 정말 고맙습니다.

"저 사고쳤어요." 응모글입니다. <제주의소리>

<강충민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