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편지(11)] 한라산 큰부리까마귀

맵고 차갑기만 하던 바람결이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싸늘한 산 공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지만, 따스한 3월의 봄볕들이 나목의 숲속에 부서지는 한낮에는 봄기운에 만물이 꿈틀거리는 계절입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고 했던가요.
오롯이 양지바른 숲속엔 샛노란 복수초의 이슬 맺힌 꽃망울이 방긋방긋 미소 짓듯 피어나고 제비꽃이며 노루귀, 바람꽃을 위시한 봄의 요정들이 언 땅을 녹이듯 다투며 피어납니다.
바야흐로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어리목 깊은 계곡의 눈 녹이는 물소리에 묻어옵니다.

▲ 윗세오름의 큰부리까마귀. 등산객들이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깨끗하게 청소합니다.ⓒ오희삼
숲속의 키 작은 식물들이 봄맞이하듯 잔칫상을 벌이는 요즘, 어리목 광장엔 까마귀의 노랫소리도 우렁찹니다.
한라산의 까마귀들은 부리가 두텁고 이마가 불거져 나온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 모양새를 본 떠서 큰부리까마귀라 합니다.
등산객들이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가 저들에겐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지요.
그래서 등산객을 가득 태운 버스들이 어리목광장에 들어설 즈음에는 환영파티라도 하는 듯이 여기저기서 ‘까악 까악’ 하며 울어댑니다.
사람에게 다가가서 재롱이라도 부리는 듯이 울어대면 인심 좋은 등산객들은 과자부스러기를 내던지지요.
그러면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먹이를 낚아챕니다.
동작 빠른 녀석들은 아예 공중제비를 돌듯 묘기를 펼치며 공중에서 먹이를 채어가기도 합니다.

▲ 새벽녘 나무꼭대기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까마귀.ⓒ오희삼
먹잇감이 나타나면 까마귀들은 우선 주변의 동료들에게 이를 알리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리고는 차례차례 다가가서 한 입씩 주워 담고 날아갑니다.
동료들의 먹이도 남겨두는 배려지요.
약삭빠른 놈들은 어딘가에 먹이를 저장해 두었다가 다음에 먹기도 합니다.
저희 어리목 사무실의 송이로 덮인 지붕이 그러기에 좋은 장소인가 봅니다.
어떤 날은 녀석들이 저장해둔 먹이를 찾지 못해 이 송이 저 송이를 들춰보다가
그만 지붕 아래로 송이들이 떨어지기도 한답니다.
해서 세워 놓은 차 유리창에 떨어지기도 하고 지나는 사람의 머리에 맞은 적도 있었지요.
다행히 송이가 솜처럼 가벼운 돌이어서 큰 상처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저들은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과 총을 들고 있는 차이를 감별함은 물론이고 어른과 아이까지 구별합니다.
해서 어린아이가 던져주는 먹잇감을 낚아채기 위해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바람에 어린 아이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지요.
그런 까마귀의 재롱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까마귀가 우린 인간과 참 친근한 새라고 여겨집니다.

▲ 가없는 허공에서 흐르는 기류(氣流)를 따라 온몸을 맡기고 자유의 비행을 자랑하는 까마귀.ⓒ오희삼
새까만 색깔 때문에 흉조(凶兆)라는 선입견을 갖기 십상이지만, 까마귀는 뭇 새들 중에서 가장 지능이 높기도 하거니와 우리 선조들은 까마귀를 일러 반포지효(反哺之孝)라 하여 저를 키워 준 부모가 늙고 병들었을 때는 먹이를 물어다 어미를 살리는 효(孝)의 표상으로 여겼습니다.

▲ 까마귀들은 무리생활을 하지만 일부일처제의 습속을 가진 새입니다.ⓒ오희삼

까마귀는 일부일처제라는 지조 있는 습속을 가진 새입니다.
보통의 야생동물들은 강하고 힘센 수컷만이 무리내의 암컷을 차지하지만, 까마귀는 무리 지어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밤에는 자기들만의 둥지를 트는 셈이지요.

야생의 뭇짐승들도 그러하듯이 3월은 까마귀들에게 짝짓기의 계절입니다.
봄 햇살 가득한 시퍼런 허공에 쌍쌍의 까마귀가 공중곡예를 하듯
자유비행을 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황홀하고 멋진 프로포즈도 없을 듯 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생각마저 듭니다.
인간이 그토록 갈망했던 날개를 가진 저들만의 행복이겠지요.
가없는 허공에서 흐르는 기류(氣流)를 따라 온몸을 맡기고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 구애를 하는 저들의 몸짓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본능이 아닐는지요.

▲ 푸른 허공을 가르는 까마귀. 인간이 그토록 갈망했던 날개를 가진 저들만의 행복이겠지요.ⓒ오희삼

까마귀의 높은 지능은 저들이 표현하는 소리에서도 쉽게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무리생활을 하는 까마귀들은 상황에 따라 울어대는 소리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음정의 높낮이와 박자, 울어대는 횟수도 확연히 다른 것이지요.

▲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거의 비슷한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소리와 음정, 횟수 등이 조금씩 다릅니다.ⓒ오희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단순한 울음 -까악(어떤 놈들은 울다가 트림이 섞이기도 합니다), 구애를 청하는 애교 섞인 소리-까가각 까가각, 침입자의 출현을 동무들에게 알리는 다급한 소리(까악 깍깍깍깍)- 이 때는 위협의 강도에 따라 울음의 강도와 횟수가 달라집니다.

▲ 까마귀들은 무리 내의 우두머리나 연락병이 맨 처음 내지른 소리를 듣고, 이를 복창하여 동무들에게 알려주는 부관들도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오희삼
무리 내의 우두머리나 연락병이 맨 처음 내지른 소리를 듣고, 이를 복창하여 동무들에게 알려주는 부관들도 정해져 있다고 하니 까마귀 무리의 자유로운 듯 하면서도 치밀한 조직이 가히 군대기강에 비길 만 합니다.
이런 신호들은 순식간에 무리 내에 전달이 되어, 정말 위협적인 침입자가 나타날 적엔 주변의 까마귀 떼가 일시에 몰려들어 하늘을 뒤덮기도 합니다.
냉혹한 자연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야성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저들만의 생존방식인 셈이지요.

▲ 하루의 일과를 마친 까마귀 떼들이 무리를 지어 저들의 보금자리로 귀환하는 풍경은 또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는지요.ⓒ오희삼
노을이 서녁하늘을 적시고 저녁 어스름이 어리목 광장에 내려앉을 무렵에는 하루의 일과를 마친 까마귀 떼들이 무리를 지어 저들의 보금자리로 귀환하는 풍경은 또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는지요.

무리생활을 하는 까마귀 사회에도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뭇짐승들의 대장이라면 사냥을 잘 하거나 힘이 세어서 대장을 자처하지요.
그렇지만 수많은 무리를 이끌어야할 까마귀 사회에서는 단순한 힘(力)보다는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한 법이지요.
이러한 지도자란 무리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예리한 판단력과 함께무리내의 질서를 유지하는 친화력 또한 필요한 법이지요.
해서 보통은 늙었지만 나이가 많은 이가 까마귀 무리의 선장 역할을 한답니다.
경험만큼 현명한 지혜가 없다는 것을 까마귀들도 알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 홀로 앉아 주변을 경계하는 폼이 오늘 무리들의 안전을 위한 보초를 서는 놈 같습니다.ⓒ오희삼
밤눈이 어두운 까마귀들에게 부엉이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한 밤 중 야간투시경을 이용하듯 어둠을 밝히고 밤의 무법자인 부엉이들은 까마귀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인 셈이지요.
부엉이의 습격이라도 당한 다음날에 현명한 까마귀 무리의 대장은 동무들을 이끌고 숲속을 샅샅이 뒤져 부엉이들에게 복수를 단행하기도 합니다.
훈련도 없이 갑자기 모아들인 군인들을 일컬어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하지요.
까마귀가 들으면, 섭섭함을 넘어 떼로 몰려들어 경을 칠지도 모를 일입니다.

▲ 비상을 준비하는 까마귀.ⓒ오희삼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먹으면서도, 우리들이 동정심으로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도, 강자와 약자의 구별도 없이 평화롭게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새까만 까마귀가 때로 정겹습니다.

단지 얼굴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벌이 다르다는 이유로
구별하고 파벌 짓고 차별하는 우리네 풍습이 저들의 새까만 눈동자에는 어떻게 보일런지요.

까마귀는 우리의 교만을 일깨우려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준 조용한 메시아는 아닐런지요.

새들이 떠난 숲은 사람도 살 수 없는 황무지일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오늘도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어댑니다.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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