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 없이 휴가 보내기 프로젝트] 제주 올레

▲ 친절한 안내판 내 인생에도 이렇게 선명한 안내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 박진희

비행기를 놓쳤다.

'건어물녀, 따뜻한 겨울나기'라는 원고 청탁을 받은 때쯤 부푼 마음으로 비행기 티켓을 사놨으니, 거의 두 달 전 일이다. 그러나 변수가 잦은 직업을 가진 터라 나는 결국 떠나기로 했던 날짜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는 꼭 떠날 수 있겠지! 했던 시간에 티켓팅을 하고 여유를 부리며 택시를 탔으나, 5분 만에 도착할 거리가 꽉 막혀 비행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비행기 놓치고 택시비 깨지고…. 우여곡절 끝에 주위 지인의 도움으로 한 시간 뒤에 비행기를 탔고, 겨우겨우 꿈의 섬 제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에이씨,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시작하자마자 기분 다 잡쳤네" 했을까? "노노". 나란 인간의 삶은 원래 해프닝 투성이로 점철되어 있기에 그런 사소한 일로 제주도에 대한 열정이 쉽게 식지 않는다. 오히려 기대에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는 무섭게도 혼자 씨익 한번 웃어본다. "이 짧디 짧은 여행이 얼마나 재밌으려고 초반부터 고생이지?" 하고.

▲ 여행 혼자이지만 혼자이지 않은 여행. 각자가 만들어가는 여행 이야기 ⓒ 박진희 여행

여행은 혼자 떠나도 둘이 될 때가 있고, 함께 가도 혼자 될 때가 있다. 시끌벅적할 때가 있고, 철저하게 외로워질 때가 있다. 여행은 인생과도 같아서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이런 사소한 악재에 휘둘리면 안 된다.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가면 되니까.

좀 더 털털한, 그래서 뭐든 재밌어지는 여행, 해보고 싶다면 아래 내가 제시한 조건을 한번 고려해보는 것은 어떨까?

#1. 그 어떤 것과도 친해질 준비가 되었는가

☆ 내게 너무 친절한 화살표

산티아고에 노란색 화살표가 있다면, 제주에는 파란색 선명한 화살표가 나를 안내한다. 처음엔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찾기가 어려워 몇 번을 놓치고 뒤돌아가서 다시 길을 시작하곤 했었다. 그렇지만 한 시간 정도 길과 친해지고 나면, 저 멀리 바람에 흔들리는 리본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 화살표 사진엔 화살표가 세 개 숨어 있다. 올레꾼들에겐 확연하게 잘 보이는 화살표 ⓒ 박진희 화살표

어디 그뿐인가, 화살표의 표정도 느낀다. 나를 응원하는 화살표, 벌써 지쳤냐는 듯 날 한심하게 보는 화살표, 화난 화살표, 조금만 더 힘내 보라며 달래는 화살표…. 그런 화살표와 이야기 정도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면 여행이 더 즐겁지 않을까. 철저하게 혼자인 시간은 가끔 미친척하고 무생물과 대화하는 것도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 프란체스카도 한번쯤 만나야지

해안을 끼고 걷는 코스와는 달리, 13코스는 바다 포구에서 시작해 숲길을 걷고 마을로 들어가 오름을 하나 넘고 다른 마을로 가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올레길이다. 해안길에 매력을 느껴서인지, 아직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지 못해서인지, 6시간 길을 걷는 동안 올레꾼은 나 하나였다.

<반지의 제왕>에서나 볼 법한 큰 나무숲길을 지날 때, 아무도 없는 큰 벌판을 지날 때, 약간의 무서움이 있긴 했지만 바람 쌩쌩 부는 그곳의 잊을 수 없는 풍경을 지금은 나 혼자만 만끽하고 있다는 그 기쁨도 남달랐다.

▲ 저지오름 오름 정상이 엄청나게 이쁘다. 그러나 입구로 가는 길은 엄청나게 무서운 공동묘지길 ⓒ 박진희 저지오름

사진도 찍고, 마을 사람들과 놀기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나는 빠른 속도로 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길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저지오름 정상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어서 (1500m) 해가 지기 전에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네 시 반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날이 굉장히 흐려서 어둑어둑했던 시간. 드디어 저지오름 입구가 보였다. 가팔라지는 산등성이에, 그래도 해지기 전에 완주하겠다는 기쁨에 고개를 앞으로 내미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엔 수천 개의 무덤이 있었다. 오름 입구는 마을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공포감이 밀려오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욕구가 불타올랐다. 그러나 왠지 사진을 찍으면 접신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무서우면서도 이 무서움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던 시간. 철저하게 혼자였지만 긴장감을 놓칠 수 없었던, 그리고 너무 아름다웠던 13코스. 나는 강력추천한다.

#2. 그대, 열린 마음과 뻔뻔함을 가졌는가

13코스 길 1/3쯤 왔을 때였다. 멀리서 할아버지 한 분이 손을 흔든다. 귤농사를 짓는 분이다. 나에게 가방을 열어 보라시더니 귤을 막 쓸어담아주신다. 아직 반도 못 걸었는데 이렇게 많은 귤을 짊어지고 가는 건 재앙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퍼주는 것 좋아하는 어르신께 가장 예의바른 모습은 "감사합니다" 하며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란 걸 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제주도민의 인심 가방 가득 채우던 귤인심. 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고향 부모님께 보내드릴 귤 한박스를 샀다. 이렇게 올레꾼들을 보면 그냥 귤을 주시는 분들이 많다. 그러니 농사짓는 귤을 막 따는 일이 없길 바란다. ⓒ 박진희 귤

제주 귤 정말 맛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한 상자 보내드리고 싶어 가격을 물었더니, 15kg에 택배비 포함해 1만5천원. 너무 싸다. 귤도 한 상자 사고, 길거리에서 할아버지 말동무도 되어 드렸더니, 할아버지 기분이 급 좋아지셨는지, 집에 가서 밥 먹고 걸으라고 하셨다. 음식 마다하는 법 없는 나는 할아버지의 경운기를 타고 집에 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집 둘째 며느님과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다. 두 시간 줄기차게 걷고 먹는 참이니 고봉으로 담긴 밥 한공기를 아주 그냥 뚝딱 해치웠다.

여행지에서의 약간의 뻔뻔함과 열린 마음은 남들에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 제주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의 제주, 경운기 타고 밥 얻어먹으러 가는 길 ⓒ 박진희 경운기

#3. 서로 여행스타일을 인정해주는 마음

사실 여행 동반자가 있었다. 물론 각자가 애용하는 항공사의 마일리지로 싸게 오려고 따로따로 제주도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3일치 게스트하우스에서 읽을 책을 가져와 완독했고, 나는 다리가 쪼개질 정도로 싸돌아다녔다. 서로 여행 스타일을 인정하는 일은 참 귀한 일이다. 그리고 생각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다.

▲ 바다 비행기타는 시간 전까지 부지런히 발품 팔며 돌아다녔다. 이곳은 북쪽 해변인 함덕해수욕장 ⓒ 박진희 함덕

3일 동안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의 마지막 날, 올레 한 코스를 걷고 초죽음이 되어 들어가니, 혼자 온 노총각 아저씨가 각종 양념을 뿌리며 멋지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꼭 한 번씩 보는 독특한 여행자다. 그는 커다란 와인잔까지 준비해 와인과 스파게티를 먹었다.

마지막 날, 술이 빠지면 되나. 다리가 쪼개질 듯하여 다시 밖으로 나가 술을 사오기엔 너무 귀찮아서 나는 요리조리 어떻게든 그의 와인을 얻어먹을 수를 썼다. 결국 아저씨의 와인 두 병을 함께 해치웠고,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자들이 하나 둘 동석하여 서로 음식과 술을 나눠먹었다. 여행이라는 공감대만으로도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 충분하다.

그대,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 두려운가. 혼자이나 혼자이지 않은 여행을 만끽하라.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제휴에 따라 싣습니다. <제주의소리>

<제주의 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