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 화해를 넘어 상생으로Ⅱ]'몰라'로 일관한 김성홍 구장과 무차별 학살을 막은 장성순 경사.

▲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1949.4) -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발췌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 신흥리에서 청년 70여명이 갑작스레 ‘홀치기’ 당한 것은 1948년 12월 18일의 일이었다.

바늘이 여러 개 매달린 낚시줄을 물고기가 지날만한 곳에 드리웠다가 확 잡아채면 낚시바늘이 몸 여기저기에 꽂힌 물고기들이 올라온다. 이런 원시적 낚시법을 ‘홀치기 낚시’라고 하는데, 신흥리 주민들은 ‘싱싱하던’ 마을청년 70여명에 대한 토벌대의 집단학살극을 이러한 낚시법에 빗대어 ‘홀치기 사건’이라고 부른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봉기로 본격화된 ‘제주4.3사건’은 그 해 11월 중순부터 군경 토벌대가 벌인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토벌대가 자신들이 주둔한 해변마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총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疎開令. 해변마을로의 강제 이주 정책)을 내리면서 적게는 수 십 명에서 많게는 수 백 명에 이르기까지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야만적인 살륙의 광풍이 제주도에 몰아친 것이다.

신흥리에 대한 소개령은 12월 14일에 내려졌다. 해변에 위치한 신흥1구(방구동.보말동.알동네)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해변에서 약 3Km 가량 북쪽에 위치한 신흥2구(여우내.고수동)에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신흥2구 주민들은 신흥1구나 태흥리.토산리 등으로 이주했다.

일반적인 소개 시기인 11월 중순을 한 달이나 넘긴 것으로 보아, 토벌대는 당초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던 신흥리에 대해 소개시킬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신흥리 주민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 '전과 올리기'위해 9연대 '홀치기 사건'으로 신흥리 주민 70여명을 학살

하지만 나흘 뒤인 12월 18일, 토벌대는 소개지인 신흥1구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청년 40여 명을 호명한 후 남원지서로 끌고가 수감시켰다. 이튿날에는 청년 30여 명이 ‘자수하기 위해’ 스스로 남원지서로 찾아갔다. 토벌대는 이 청년들을 남원지서 인근 밭이나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으로 끌고가 집단총살했다.

이것이 신흥리 청년 7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른바 ‘토벌작전’의 실상이다. 왜 토벌대는 자신들의 명령에 따라 소개한 청년들을 학살한 것일까. 제민일보에서 발행한 '4.3은 말한다'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신흥리민들이 갑자기 집단학살된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그 시기의 토벌 전략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주민들이 집결했다가 '홀치기' 당했다는 12월 18일은 제9연대의 토벌작전이 극에 달했을 때이다. 토벌대는 많은 사람들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을 들여다보면, 무장대와 교전을 벌인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중산간을 휩쓸고 다니다 은신해 있던 주민들을 총살하거나 해변마을에서 멀쩡히 살고 있는 주민들을 향해 학살극을 벌인 것이다. 미군 G-2보고서는 이즈음의 경비대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로 '수준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 '4.3은 말한다' 5권 P.115]

즉 제주 주둔 제9연대가 1948년 12월말로 대전의 제2연대와 맞바꿔 교체하게 되자, ‘여순사건’을 진압한 바 있는 제2연대보다 더 높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적극적인 토벌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큰 의문이 생긴다. 토벌대는 무엇을 근거로 청년 40여명을 ‘호명’한 것이며, 또한 청년 30여 명은 왜 스스로 ‘자수’하였을까.

토벌대가 청년들 중 일부를 호명한 근거는 바로 ‘명단’이었다. 무장대가 마을에 세력을 떨치던 시절,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식량 등을 제공하거나 시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내용들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작성된 것이다. 일부 청년들이 자수한 까닭도 바로 혹시나 더 있을지 모를 ‘명단’ 때문이었다.

이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 손가락질 하나에 목숨이 좌우되던 상황은 주민들 사이에 불신의 골을 깊게 했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 제주농업학교 천막수용소(1948.11) -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발췌
# 산쪽에서 물어도 '몰라', 토벌대가 물어도 '몰라'…'몰라'로 주민희생 최소화

홀치기 사건 이후 내일 일을 장담하지 못하며 공포에 떨며 힘겹게 살아가던 신흥리 주민들에게도 한줄기 삶의 희망은 있었다.

희망의 끈은 당시 신흥1구의 김성홍 구장(현재의 리장)과 남원지서에서 파견나온 장성순 경사였다.

토벌대는 김성홍 구장에게 자꾸 주민들의 성향에 대해 물었다. 당시 토벌대의 명령에 거역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이 애꿎은 희생으로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김 구장은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했다. 심지어 ‘모른다’며 공문조차 처리하지 않았다.

▲ 몰라 구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영배씨
신흥리 주민들은 김 구장이 토벌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몰라'란 답변으로 일관해 희생을 최소화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성향에 대해 일체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주민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붙여진 ‘몰라 구장(區長)’이라는 명예스러운 그의 별명은 신흥리는 물론 인근 마을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사건이 벌어진지 6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몰라 구장'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식들조차도 '몰라 구장 딸' '몰라 구장 아들'로 지칭되고 있었다.

현차생(89.여.신흥2리) 할머니는 "사람 목숨이 죄가 있든 없든 말 한마디나 손가락 하나로 없어지던 당시에 '몰라' 구장은 누가 물어보면 무조건 '난 그런 거 몰라'란 대답을 했다"며 "몰라 구장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고마워했다.

현 할머니는 '몰라 구장'의 선행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본명은 모른다고 밝혔다.

당시 10살로 소개령에 따라 방구동(신흥1구)에 6개월여간 살았던 김영배씨(68.신흥2리)는 "그 어른(몰라 구장) 얘기는 인근 태흥리나 토산리에서도 알 정도 유명하다"며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도 '몰라 구장'이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몰라 구장은 실제로는 구학문을 많이 한 아주 유식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훈장일을 할 정도로 한문에 조예가 깊었고, 일제 강점기 때에도 '동수'(현재의 리장과 비슷) 역할을 한 적이 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몰라 구장은 4.3이 끝난 후 1970년대 초반에 돌아가셨고, 딸은 지금도 ‘몰라구장 딸’로 불리며 신흥리에서 살고 있다.

# "산에 갔다온 사람 불문에 부치겠다"…무차별 학살 막은 장성순 경사

'몰라 구장'과 더불어 장성순 경사에 대한 이야기도 신흥리에서 회자되고 있다.

4.3 당시 경찰이라면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게' 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홀치기 사건'이후 신흥리 주민들에게 군인과 경찰은 그 자체가 '공포'였다.

이런 상태에서 남원읍 하예리 출신의 장 경사가 1949년 초 남원지서에서 파견대장으로 신흥리로 부임하게 된다.

▲ 장성순 경사에 대해 증언하는 오인문씨
하지만 장 경사는 부임하자마자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 산에 갔다 온 사람이라할지라도 불문에 부치겠다. 누가 어떻다는 식의 말을 내게 하지 말라. 나는 이제부터의 일로써 모든 걸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공포에 떨던 주민들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김영배씨는 "그 분은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경찰이면서도 서북청년단이나 군인들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선처를 했다"며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3남매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분 덕택"이라고 말했다.

오인문씨(80.신흥1리)도 "장 경사는 1949년 초부터 약 1년간 신흥리에서 파견대장으로 근무했다"며 "그분은 모든 일을 주민 위주로 해서 부임한 후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밝혔다.

오씨는 "그동안 삶에 치여 고마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며 "장 경사의 처는 신흥리 방구동 사람으로 현재 하예리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무차별 학살로 점철된 당시 상황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몰라구장'과 '장경사'의 선행은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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