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학생 문예작품 공모전 대상 - 양수연(신성여고)

그리운 할머니

신성여자고등학교
3학년 4반 양수연

산문 ‘그리운 할머니’는 제주도가 4.3 57주년을 맞춰 용서와 화해, 평화와 상생의 정신을 주제로 한 제6회 제주4.3 학생문예작품‘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신성여고 양수연 학생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4월3일 4.3사건 희생자 범도민 위령제 행사장에서 추모의 글로 낭독하게 됩니다.[편집자]


▲ 신성여고 양수연 학생
우리 할머니께서는 8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할아버지와 꼭 같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종종 입버릇처럼 “니 할애비와 내는 한 몸이여.”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기도 하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언제나 끝에 가서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자신이 살 수 있었다’는 부부 일심동체론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라서 할머니와 따로 살게 되었지만,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할머니의 인생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토록 고통스러웠으면서도 끈끈한 정을 잇게 한 힘은 무엇인가?“

 저는 방학을 이용해서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도서관을 방문하고, 아버지를 졸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생의 단편을 듣고 재구성해서 나름대로 할머니의 인생을 그려보았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1920년생. 기미 독립 선언 이듬해에 태어나셨습니다. 여자라서 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일제시대에, 농사를 지어봐야 빚만 늘고 늘어나는 빚 때문에 농토를 빼앗긴 부모를 따라 우리 할머니는 이리 저리 떠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찾아든 곳이 두메산골 아무도 없는 곳,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리는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17살에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할아버지와 결혼했습니다. 세상을 잘 만났으면 판사 정도는 할 수 있었다는 말씀으로 세상에 대한 원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징용으로 할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된 7년의 세월도 태평양 전쟁 말기의 잔악한 일제의 발악도 4․3의 참상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4.3당시, 우리 할머니의 고통은 순전히 8촌 되는 친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말하자면 ‘폭도세계’의 중간 간부였습니다. 마을에 내려왔을 때는 갈 데가 없으니 주로 친척집을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그를 미행하는 사람은 그 친척들을 폭도의 동조자로 고발하였습니다. 그 동조자로 몰린 분들은 나중에 군인, 경찰, 서북 청년단에 의해 ‘처단’되었습니다. 아주 참혹하게….
 

▲ 始原 ⓒ 강요배 화백. 동백꽃 지다
우리 할아버지에게도 죽을 고비가 있었습니다. 소개령으로 마을을 버리고 공천포 바닷가에서 멍석으로 비바람을 막아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8촌 되는 폭도 친척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고 앙심을 품은 마을 청년들이 할아버지의 손발을 묶고 집도 아닌 집에 불을 지른 것이었습니다. 잠귀 밝은 할머니가 바닷물을 퍼다가 불을 끄고 할아버지를 간신히 살려 냈습니다.
 
그 8촌 되는 친척은 4.3사건의 와중에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목을 자르고 그 목을 부인 등에 지우고 서귀포 시내를 다 돌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매일 시장 입구에서 며칠 동안 효수한 후 서귀포 앞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 부인은 이듬해 자살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살아계신 동안 , 4.3으로 희생된 친척들에 대한 상념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소 먹이러 산에 갔다가 폭도들에게 희생된 6촌, 4.3이.끝난 뒤에 육지 형무소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가 초로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온 말없는 4촌. 연좌제 때문에 취직이 안 되어 어렵게 살아가는 또 다른 6촌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근심, 걱정, 연민과 노심초사가 할머니의 일과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어려운 친척들의 형편을 자신의 처지보다 더 걱정을 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3년 전에는 4.3때 산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려 산행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서, 4.3때 희생된 친척의 유골이 있음직한 곳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부들을 동원해서 하루 종일 찾고 포크레인을 빌려서 땅을 팠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말년은 그런대로 행복하였습니다. 만시지탄의 느낌이 없지 않지만, 비극적인 4.3이 재조명되고 재평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증언자였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이 증언이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였습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한 맺힌 이야기. 그런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어린애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를 채록하는 분들이 더 분노하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몇 년만 더 사셨으면….
4.3 평화 공원도 보고,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도 듣고,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도 보고 했으면 좋으련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할머니의 삶은 무의미한 삶이 아니었어요. 온 몸으로 가르쳐 준 교훈이었어요.

 할머니의 삶을 가슴에 간직하고 할머니의 걱정이 헛되지 않도록 이 손녀가 열심히 노력할게요.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사라지고, 웃음과 행복과 평화가 이 땅에 넘칠 때까지. 할머니! 약속할게요. 다짐해요.
그리운 할머니!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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