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12)] 제5대 김충희 도지사 ①

우당(愚堂) 김용하 지사에 이어 김충희(金忠熙.59세)가 제5대 도지사로 부임한 것은 1949년 11월15일이었다.

김충희의 지사 발탁은 제주도내 우익진영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그것은 역대 제주도지사들이 모두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임명한 사람들이었으며, 제주도제 실시에 사실상 물심양면으로 공이 컸던 도내 우익인사들의 기용이 철저히 배제돼왔기 때문이었다.

김충희는 초대 박경훈 지사가 경질될 때부터 지사로 꾸준히 거론돼오다가 이순(耳順)을 앞둔 나이에 지사로 전격 기용됐다. 제주도내 인사 가운데서도 김충희 만큼 중앙 정계와 폭넓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사람도 드물 정도로 그는 중앙 요로 마다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 많았다. 김충희는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과 국민회 관계로 지면이 있는 데다 중국 상해임시정부인사인 김구(金九),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과도 친했다.

제주면 외도리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충희는 제주신의학교(제주농업학교 전신)를 졸업한 후에 보성학당(보성고등학교 전신)을 다니다 한일합방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하향했다. 일제 때 구좌에서 1년여의 교직생활이 공직의 전부였던 그의 지사발탁은 행정능력보다는 당시 우익세력을 대표하는 탄탄한 기반과 중앙인사들과의 교분, 강한 정치력 등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었다.

우익 대표 김충희 발탁...김구 신익희와도 교분

김충희 지사는 먼저 도정이 해야 할 일을 4.3 사건 피해복구로 정하고 행정력을 대(對)중앙절충에 집중시켜 나갔다.

김 지사는 도일원에 대한 초도순시를 끝낸 뒤 필요한 물자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부는 미국 하원의원이 한국경제원조액 6200만 달러에 대한 지출안을 부결함으로써 상당히 난감한 상태였기 때문에 면담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임 이듬해인 1950년 1월31일 미국 상원외무위원회가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액 6000만 달러를 가결시켰다.
김 지사는 정국이 다소 안정된 틈을 타서 새해 인사를 겸해 비서인 좌문규(左文圭)와 함께 상경했다. 좌 비서는 경위로 경찰에 재직중 김충희에 의해 비서로 발탁됐으며 좌 비서의 부친과 김충희와는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경무대로 올라간 김충희는 비서실을 통해 이 대통령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그 동안 4.3 사건에 대한 군대와 경찰의 진압성과와 당면한 제주도의 민생문제를 설명했다. 특히 사태진압후의 이재민에 대한 실정을 자세히 보고하고 파괴된 가옥과 교량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은 김 지사의 보고를 받고 "구체적인 자료를 제출토록 하되 제주도민들의 복구의지가 있다면 정부에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 지사는 귀임 즉시 이재민에 대한 구호업무를 전담할 기구의 필요성을 느껴 민간단체로서 제주도부흥위원회를 조직하고 파괴된 가옥과 도로 등을 복구하기 위해 중앙으로부터 지원이 필요한 식량과 의류, 예산 등을 파악토록 하는 한편 중앙건의 업무를 맡도록 했다.

이승만 대통령 제주도지원 약속...부흥위원회 구성

제주도부흥위원회 위원장은 처음에 김 지사가 맡아 운영하다가 제3대 도지사를 지낸 임관호에게 넘겨 이재민에 대한 구호업무를 전담케 했다. 사무국장에는 제주도 사회과장과 상공과장을 역임한 이인구(李仁九)가 임명됐고 위원에는 박우상, 양홍기, 강지수, 박치순, 박종실 등 쟁쟁한 지역인사들이 참여했다.

김 지사는 부흥위원회가 조사한 자료들을 모아 경무대에 제출했다. 정부는 그해 2월하순 제주도부흥위원회가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사회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도복구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했다. 복구위원은 내무부, 재무부, 문교부, 사회부, 부흥부 차관 등 복구사업에 필요한 관계부처의 차관으로 위촉됐다.

이로써 제주도의 복구사업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제주도복구위원회는 20여명의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고 이재민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김충희 지사는 이들과 함께 도일원을 다니면서 사태로 황폐된 현장을 보여주면서 복구에 필요한 물자지원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김 지사의 노력으로 정부는 조사단의 귀경 즉시 제주도에 대한 피해복구예산을 2억환으로 확정하는 동시에 시멘트 6만 포대를 보내왔다.

제주도청 후보지 현 제주시청 부지로 결정...6.25발발로 신축 불발

이와 함께 김 지사는 1949년 1월3일에 방화로 불에 타버린 도청 청사에서 행정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도청건립계획을 세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관덕정에 임시 칸막이를 설치하여 도청으로 임시 사용하고 있었으나 사무실이 너무 협소하여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사실을 비롯한 서무,회계과 등 주요 부서들은 관덕정에 사무실을 두었으나 상공.수산과 등은 불에 탄 채 복구되지 않은 도청 본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김 지사는 박우상, 박명효, 박치순 등 11명으로 도청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도청건립에 본격 나서기 시작했다.

우선 도청 신축부지를 물색하기로 했다. 김 지사는 도청부지는 백년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도민들의 합의가 우선이라고 여겨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도청신축후보지 결정 도민대회를 개최하였다.

관덕정 광장에 개최된 도민대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각자 자신의 의견을 밝혔는데, 어떤 이는 현재의 관덕정을 증축해서 그대로 사용하자는 의견과 서쪽인 먹돌새기로 옮기자는 의견, 사라봉 근처의 동쪽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주민들은 대체로 동쪽과 서쪽이설로 좁혀졌으나 주민들간의 심한 의견차이로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차라리 제주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남쪽으로 이설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관심을 모았다. 이 의견은 제주시의 도시발전과 인구증가 등을 고려할 때 가장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에 따라 김 지사를 비롯한 도청건립 11인위원회는 어느 청명한 날을 택해 후보지 답사에 나섰다.

이들은 광양(光陽)을 지나서 고산동산(현 제주세무서 앞에 위치한 동산)에서 제주읍내를 살펴보고 동서남북이 교차하는 현재의 제주시청의 위치가 최적지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도청건립에는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김 지사는 예산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당시로서는 이재민들에 대한 구호문제가 더욱 시급한 실정이었다. 김 지사는 일단 도청건립계획을 유보하고 도민들의 구호에 전력을 쏟았다. 도청건립은 훗날 6.25 사변으로 실현이 더욱 어려워졌다.

2대 국회의원 선거.4.3 정부책임 주장파문속...유력후보들 참패

그 무렵 제주도에는 청년방위대가 조직됐다. 1950년 4월1일에 조직된 방위대는 신문방송 등을 통한 공개모집을 원칙으로 하면서 제주도청을 비롯한 각 관공서와 학교 등에 근무하고 있는 청년들의 지원을 받아 1개월간의 군사교육을 거쳐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되는 제도였다.

청년방위대장에는 강성건(姜成健. 방위중령), 부대장에는 홍인표(洪仁杓. 방위소령)였으며 대원의 숫자가 제주도내 전체적으로 2만여명에 달했다. 도내 청년들을 총망라한 방위대는 각 부락과 직장별로 구성되기도 했는데 보통 군복에다 무궁화 견장을 달아 외관상 군인과 흡사했다.

그해 4월19일 정부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5월30일에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제주도에서는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의 재선거가 실시된지 1년20일만에 다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게 됐다.

제헌의원의 2년 임기만료로 실시하게 되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정부가 주관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다. 선거구는 제헌의원 선거때와 마찬가지로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남제주군 등 3개구로 나누어졌다.

제주도선거위원회에 등록된 후보자는 무려 27명에 이르렀다. 북제주군 갑구에서는 8명, 북제주군 을구에서는 10명, 남제주군에서는 9명이 출마해 1대 때보다 더욱 후보 난립현상을 보였다.

후보자 중에는 전라남도 회계과장 출신의 문종철(후에 법제실 제2국장. 제주대학장 역임), 약관 28세의 대동청년단장 김인선(金仁善), 前제주도지사 김용하, 민주당중앙위원 양제박(후에 제9대 제주도지사 역임), 금융조합이사 홍문중, 금융조합전무이사 강창용, 북제주군수와 남제주군수 출신의 김영진, 현역의원 양병직과 오용국 등 쟁쟁한 인사들이 대거 출마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유세장에는 항상 유권자들로 만원을 이뤘다.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당시만 해도 금기처럼 됐던 정부성토가 과감히 터져 나와 4.3사건으로 억눌렸던 도민들의 가슴을 간접적이나마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더욱이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열린 조천초등학교 유세에서 대동청년단장 김인선은 4.3사건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하면서 초미의 관심이 됐다.

김인선은 "정부는 빨갱이 한 두 명을 잡겠다고 부락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양민을 희생시킨 사실을 시인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인선은 1년전에 있었던 제헌의원 선거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듯 다른 후보보다 대정부비판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제주사회에 파문을 불러일으킨 유세로 최연소, 최다득표로 당선됨으로써 국내 정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또한 그는 각 마을마다 조직되고 있는 청년단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유세 때마다 청년단복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투표결과 북제주군 갑구에서는 김인선, 북제주군 을구에서는 강창용, 남제주군에서는 강경옥(康慶玉)이 각각 당선됐으며 현역의원 오용국과 양병직은 당선자와 상당한 표 차이로 재선에 실패했다. 또한 당선이 유력시됐던 문종철과 김용하 김영진 양제박 등이 참패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