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6) 은성했던 시절은 가고 - 건입동산지물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한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2009년 현재의 산지물 ⓒ김순이

1960년대, 우리집에서는 주로 산지물에 가서 빨래를 했다. 산지물 가는 길에는 동문교(東門橋)가 있었다. 그 다리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밀물 때인지 썰물 때인지 알 수 있었다. 산지물은 밀물 때면 바닷물로 덮였다. 그래서 빨랫감을 갖고 나서기 전에 우선 동문교까지 뛰어갔다 오곤 했다.

시내에서도 가장 사람이 붐비는 산지물은 식수를 뜨는 곳과 채소를 씻는 곳, 빨래를 하는 곳이 구분이 되어 있었다. 궂은 빨래는 아래쪽에서 한 후 윗물에 와서 헹구는 게 순서였다. 그러나 이런 절차를 무시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고 또한 그런 꼴을 절대로 눈감아 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들의 격돌은 빨래터를 아연 긴장시킨다. 가시 돋친 말들이 오고가다가 급기야는 한쪽이 실력행사에 들어가 빨랫감을 바락 밀쳐 물에 흘려버리든가, 상대방의 얼굴에 물을 끼얹으면 드디어 몸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구경꾼들에 의해 싸움은 곧 끝난다. 그때까지는 손을 놓고 흥미롭게 구경하던 아주머니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떼어놓고 나이든 할머니가 한마디 일갈한다. “젊은 것들이 어디서 배운 행실이고!” 격렬한 기세로 한 판 붙었던 그들은 계면쩍어 하며 제 자리로 가고, 다시 빨래방망이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면서 활극은 끝이 난다.

빨래하러 갔다가 흥미진진하게 보았던 이 장면,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금도 빛 바래지 않고 내게 남아있다.
산지물은 일제강점기 이후 산지항의 개발과 함께 그 규모가 확장된 물이다. 그 전에는 금산물과 가락쿳물이 주로 이용되었으나 제주읍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산지물의 확장은 당연했다. 이후 산지물은 제주도내에서 사시사철 이용자가 가장 붐비는 물이 되었다. 낮에는 여성들이 어찌나 붐비는지 물 긷기나 빨래 등은 한참동안 줄서서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산지물은 제주시의 근현대를 지켜본 증인이기도 하다. 외부와의 연락이나 물류의 출입이 모두 선박에 의지하던 시절, 산지항에 입항하는 선박과 선원들에게 이 물은 그야말로 생명수였다. 선박들은 다음 항해를 위하여 산지물에서 길어간 물로 물통을 채웠다. 선원들은 바다에 절은 몸을 이 물에서 씻었다.

산지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산지물은 그 모든 것들의 오고감은 물론 흥망성쇠까지도 목격했다. 일인들의 게다 발자국소리도 미군들의 군화 발자국소리도 이 물은 들었다. 우리 할머니들의 짚신이 고무신으로 바뀌는 것도 이 물은 보았다. 이렇게 붐비던 물에 쇠락의 그늘이 드리워진 건 제주시에 수도가 시설되면서이다. 산지천을 살리면서 지금 그 일부가 복원되었으나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물이 되고 말았다. 가장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 했던가. / 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담당관

*찾아가는 길-제주시 동문로타리→산지항 방향→산지교 밑

지식정보 <물통(용천수와 봉천수)>

제주도에는 삶에 필수요소였던 물통 흔적들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용천수(솟아나는 물)와 봉천수(인공으로 만든 우물)가 있으며, 이곳은 1970년대 상수도시설이 될 때까지 사람들의
삶터였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항아리에 빗물을 받아두었다가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제주의 초가는 물 공급지여서 지붕 한쪽 귀퉁이에 항아리를 놓아두면 물이 고이는데 이를 ‘촘(아래아)항’이라 불렀다.

용천수는 주로 해안마을에 집중되어 있고, 중산간마을은 물 웅덩이를 깊고 넓게 파서 고인 물을 이용하는 봉천수가 대부분이었다. 샘물 명칭에‘못’이 있으면 우마용 봉천수이고, ‘물’이 있으면 식수용이다. 용천수는 물통의 위쪽에서 솟아나는 물은 식수로, 그 다음은 야채 씻기, 빨래하기, 그 아래는 목욕하기 등 물통의 한 울타리 안에서 다용도로 사용했다. 봉천수는 인공물통으로 식수용과 생활용으로 구분해서 사용했다.

인간의 생명수인 식수를 얻기 위하여 제주여성들은 아침 일찍 물허벅(물동이)을 지고 물통에 가서 물을 긷는 것이 하루일과의 시작이었다. 물 길러 가는 길, 우물가에서 물을 뜰 때, 빨래할 때, 공터에서 빨래를 말리는 시간 등 여성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도 교환했다. 마을에 대소사가 있으면 여성들은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다 주는 ‘물부조’가 있었다. 이러한 수눌음정신은 지금도 공동체의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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