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13)] 제5대 도지사 김충희②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인 6월15일 기획처, 내무부, 상공부, 농림부, 교통부, 체신부 등의 관계국장으로 구성된 제주개발단(단장 朴承哲 기획관)이 구체적인 제주도에 대한 복구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현지조사차 내도 했다. 이들은 김충희 지사의 안내를 받으며 전도 일원의 시찰에 나섰다.

1950년 6월25일 김충희 지사는 피해복구사업을 위해 정부에 제출할 각종 자료들을 가지고 중앙청에서 개최되는 전국지방장관회의 참석 차 목포에 머물고 있었다. 서울까지 올라갈 차편을 알아보고 있는 중에 북한의 남침 소식을 전해들은 김 지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상경을 강행했다. 그러나 서울의 모습을 본 김 지사는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곧 제주로 내려왔다.

이날 제주도는 북한의 남침 소식에도 불구하고 김충희 도지사가 전국지방장관회의 참석차 상경중인 데다가 일요일이어서 직원들은 출근조차 하지 않은 채 하루를 그냥 보냈다. 이튿날도 직원들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출근했다가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상부의 지시를 기다렸다.

사흘 뒤인 6월27일에는 정부가 서울을 포기하고 대전으로 옮겼는가 하면 6월30일에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미육군에 출동명령을 내렸으며 7월1일에는 연합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는 소식들이 속속 전해져 제주도민들은 점점 불안해했다. 김 지사가 귀향한 것은 6월 하순이었다.

6.25발발로 예상치 못한 美 경제원조처의 250억달러 제주투자 계획

사태는 점점 급박하게 돌아갔다. 7월8일에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곧이어 제주도에도 제주지구계엄사령부가 설치되고 신현준(申鉉俊) 해병대령이 사령관에 임명됐다. 도 청으로 쓰이고 있는 관덕정에 사령부가 들어섰다. 이 바람에 도청 직원들은 사무실의 대부분을 계엄군에 넘겨주고 한쪽 방에서 겨우 사무를 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7월16일에는 정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한 뒤 하루만에 부산으로 이전하는 등 전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이러한 와중에도 제주도개발계획이 뜻밖에 정부측의 적극적인 자세로 추진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ECA(경제원조처)가 한국의 경제부흥과 산업발전지원을 위해 와있었는데 6.25가 터지면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사회질서가 안정될 때까지 미국으로 일단 철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제주출신 강경옥 의원이 ECA사업을 비전쟁지역인 제주도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산피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가까스로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을 국회의원 면담일로 특별히 정하고 있었다.

7월14일 이 대통령은 강 의원을 면담한 다음날 강 의원을 집무실로 불러 "제주도개발을 위해 정부측에서 책임자를 정하고 관계부처의 담당자를 현지로 내려보내겠다"는 말하는 것이었다.

제주도개발단이 한국은행과 산업은행, ECA 직원들과 함께 외자청의 선박을 타고 제주항에 다시 도착한 것은 6.25가 발발한지 한달 밖에 되지 않은 7월26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제주도내에는 엄청나게 밀려드는 피난민들로 이들이 묵을 마땅한 숙소마저 없어 개발단 일행 50명의 숙소를 구하는 데에만 4일이 소요될 정도였다.

본격적인 조사는 7월30일에야 이뤄졌다. 그때부터 약 2개월에 걸쳐 각 분야별로 농수산.임업, 항만, 교통, 통신개발과 공장, 관광에 관한 종합적인 개발계획이 수립됐다. 제주개발단은 제주개발에 필요한 소요예산을 250억 달러로 잠정 산출하고 내도 한지 두 달 만인 9월28일 부산으로 돌아갔다. 이날은 서울 수복일이었다.

제주개발단이 부산에 도착해서 보니 정부는 9.28 서울로 모두 옮긴 뒤였다. 개발단은 제주에서 타고 왔던 외자청 선박을 이용해서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9월30일이었다. 곧 중앙청으로 향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개성과 평양지역에 대한 시찰을 하고 있는 중이어서 재가를 받기 힘들어진데다 정부의 분위기는 제주도보다 서울 복구문제가 우선돼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결국 제주도개발계획은 대통령의 재가조차 받지 못한 채 무산돼 버렸다.

4.3 종료 후 밀려든 1만여명 피난민으로 극심한 식량난

이에 앞서 제주도에 피난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간 7월 중순부터였다. 제주항과 성산항, 한림항 등을 통해 들어온 피난민의 숫자는 1만여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을 당장 수용할 장소가 없자 대부분이 공공시설에 분산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밀려드는 피난민들은 공공시설의 빈 공간이라면 모두 차지했으며 빈터에는 천막을 설치해 생활했다.

제주사회는 그야말로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그 동안 4.3 사건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복구계획을 세워 그런 대로 안정을 되찾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피난민에 대한 문제로 걱정이 더욱 늘어났다. 제주도민들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정부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아 겨우 연명하고 있는 처지에서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에 겨웠다. 그렇다고 전국이 전쟁의 혼란 속에 빠져있는 것을 알면서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도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김 지사는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앙절충을 계속 기울여 나갔다. 도민들은 도민들대로 부족한 식량확보를 위해 대표단을 구성하고 정부에 파견시켰다. 국민회 부회장 박치순 등은 농림부장관을 방문하고 제주도민 뿐만 아니라 피난민에 대한 식량문제를 설명하고 쌀 지원을 받아오기도 했다.

이같이 제주도 전역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피난민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1일 세칭 '제주도 유지사건'이 발생하여 도민들을 경악하게 했다.

김재천(金在千) 제주지방법원장, 원복범(元福範) 제주지방검사장, 홍순원(洪淳元) 제주도총무국장, 김차봉(金次鳳) 제주읍장, 전인홍(全仁洪) 제주도서무과장, 김대홍(金大洪) 제주도립병원장, 이인구(李仁九) 前제주도사회과장, 김무근(金茂根) 변호사, 최원순(崔元淳) 변호사, 이윤희(李允熙), 김영희(金瀛熙), 백형석(白亨錫) 등 제주지역 쟁쟁한 인사는 물론 현직 법원장, 검사장, 도총무국장, 제주읍장 등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계엄사에 연행된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법원장 검사장 등이 포함된 '제주도 유지사건' 파문

연행된 이들은 계엄사령부가 있는 헌병대에 끌려간 뒤 다시 제주주정공장 창고 속에 가두어졌다.

이들에 대한 연행 소식은 곧 김충희 지사에게도 전해졌다. 김 지사는 청천벽력과 같은 보고를 받고 사실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으나 계엄사령부의 철저한 보안으로 정확한 사건진상을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도내 일부 기관장과 유지 몇몇이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에 대비해서 '인민군환영위원회'를 비밀리에 조직하려 했다는 정도였다.

김 지사는 제주도내 주요 기관장과 도청 국장들의 연행으로 행정이 마비되는 것을 차치 하더라도 이들의 연행으로 도민 여론이 크게 악화될 것을 우려하고 나름대로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의 모략에 의해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한 김 지사는 이성주(李成株) 제주도경찰국장과 상의한 후 조병옥(趙炳玉) 내무부장관에게 사람을 보내 하루빨리 진상을 밝혀 무고한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이 같은 소식은 국회와 함께 부산에 피난중인 본도 출신 강창용(姜昌瑢) 국회의원에게도 전해져 강 의원이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장관에게 직접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도내 유지들에 대한 수사는 치과 의사출신으로서 계엄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 대위가 맡고 있었다. 신 대위는 자신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갖은 고문을 다함으로써 구금자 중에는 정신이상자가 생겨났는가 하면 심한 고문으로 죽는 사람도 나왔다.

도내 유지들이 구금된지 20일 후인 1950년 8월21일 내무부장관의 특명을 받은 선우종원(鮮于宗源)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이 진상규명차 내려왔다.

선우 과장은 8월20일 새벽3시 조병옥 내무부장관의 전화부름을 받고 장관실로 갔다. 그 자리에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도 있었다.

조 장관은 불문곡직하고 "지금 제주도가 적화일보 직전에 있으니 날이 밝는 대로 정예경찰 1000여명을 차출해서 곧 떠나라"는 것이었다. 선우 과장은 "경찰의 치안보고에 따르면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1000여명이라는 대부대를 움직여서 웃음거리가 되기 보다 몇 사람만을 우선 데리고 일단 현지사정을 알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개진했다.

조 내무부장관은 낙동강 방위선이 무너질 경우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그의 절박함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신 국방장관이 군 계통을 통해 입수한 정보에 의해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선우 과장은 6명의 정예경찰을 데리고 조 장관이 주선해준 UN군용기를 이용해서 거지로 변장하여 아무도 모르게 제주도에 은밀히 잠입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우선 성당을 찾아 외국인 신부로부터 "사건에 어떤 모략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진상을 자세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결과 모략에 의한 사건이라고 단정한 그는 일단 그 같은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뒤 계엄사령부를 방문하여 신 대위에게 "무슨 증거로 많은 사람들을 구속했느냐"고 따졌다.
신 대위는 처음에 "전시에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고 강경하게 나오다가 선우 과장이 하나 하나 따져 들어가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면서 변명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선우 과장이 보낸 정보보고서를 토대로 내무부와 법무부 국방부 등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을 제주에 급파했다. 합동조사반은 각 분야별로 정보수집에 들어갔다. 이들은 김충희 지사와 이성주 제주도경찰국장으로부터 그 동안의 경위를 듣고 계엄사의 과잉조사에 혐의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구금된 사람들은 모두 무혐의로 밝혀지고 구속된 지 45일만인 1950년 9월4일 석방됐다.

당시 구속됐던 이인구 前제주도상공과장은 증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때의 일을 밝혔다.
"6.25 사변이 나던 해인 1950년 8월 나는 제주도유지사건에 관련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계엄사령부 정보과에 끌려가서 보니 검사장, 법원장 등 도내 유지들이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심문과정에서 인민군환영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그때 꼭 죽는 줄만 알았다. 8월14일에는 고문에 견디지 못한 백형석 제주화물사장이 정신착란을 일으켜 마구 울부짖자 감시병들이 총을 무차별로 난사하기도 했다. 도내 인사들로 구성된 우리들에 대한 구명운동은 중앙에서 받아들여져 진상조사반이 내려왔다

. 진상조사반은 성우원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사실조사결과 허위임이 밝혀졌다.
진상은 구좌면 월정리 출신 李모씨가 계엄사령부 정보과장 신 대위와 짜고 만든 모략극이었다"

공명심에 불탄 계엄사령부 정보과장의 모략으로 밝혀져

또 강창용 의원은 "도내 인사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혐의로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부장관에게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으며 제주도에 내려온 뒤에도 구명운동에 힘쓴 결과, 마침내 전원이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신인철 과장이 허위정보에 의해 사건을 확대한 것으로 판명됐다"고 말했다.

내무부장관의 특명으로 사건조사차 내려왔던 선우과장은 후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6월의 산하가 전화(戰火)에 물들 때'라는 글(1975년 6월24일자)에서 당시 사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제주도는 미군정 때부터 공산반도들이 판을 쳐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의 발언권이 컸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군의 발언권은 횡포로 발전했으며, 이중에서도 치과 의사출신의 申모 대위가 과장으로 있는 군정보과의 행패가 가장 심했다. 이에 대해 검찰과 경찰이 반발하자 이들을 모두 반도들의 활동과 확대 연관시켰다"

그로부터 며칠 뒤 강계돈(康季敦) 제주농고 교감과 이응화(李應華)가 무고혐의로, 신 대위와 박서상(朴瑞祥) 유효선(劉孝善) 경찰관이 직권남용혐의로 각각 구속됐다. 강 교감은 신 대위가 강 교감의 집에 세 들어 살았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다음해 4월에 열린 부산지방법원 공판에서 이응화가 징역 5년, 강 교감과 박서상.유효선은 각각 징역 2년이 선고됐으며, 신 대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그러나 강 교감은 그해 11월 대구고법에 항소한 끝에 1952년 1월15일 무죄로 풀려났다.

강 교감은 한달 뒤인 2월26일 제주신보 광고란에 자신의 입장을 피력, 눈길을 끌었다.
"강계돈은 20여년간 교육에 헌신해오면서 4.3사건 당시에는 주위의 협박과 신변의 위협을 받아가면서도 생명을 내걸고 불철주야 교원 및 학생선도와 교실방화방지에 주력해왔다.
유지사건에 본인이 관련된 것처럼 떠드는 것은 자신을 영원히 매장하려는 암계에서 비롯됐음을 밝힌다.

신인철과 동거한 것이 그 이유라면 언어도단이고 추호도 양심의 가책이 없다. 고등법원의 신성한 법정에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청천백일하에 무죄판결을 받게 될 때 혈루(血淚)를 금치 못했다"
세칭 '제주도 유지사건'은 육지에서 제주도를 모두 좌익시한 데에서 빚어진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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