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편지(12)] 대지를 깨우는 봄의 교향곡

▲ 겨울잠에 잠긴 대지를 깨우는 듯 시원한 물소리가 계곡에 울려퍼지면 봄꽃들은 부시시 대지를 열고 꽃잎들을 내어보냅니다. 산은 높은 만큼 깊고, 그 깊은 계곡에선 때묻지 않은 수정같은 생명수가 솟아 나옵니다.ⓒ오희삼
콘트라베이스의 낮고 긴 음색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한라산 깊은 계곡에서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물소리 바위를 적시며 솟아납니다.
현(弦)을 튕기는 듯 가늘고 청명한 소리는
메마른 대지를 적시며 깊디 깊은 겨울잠에 취한
숲속의 생명들을 깨워댑니다.
첫 등교하는 날 아이를 깨우는
새내기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 개화를 향한 산자고의 선홍빛 봉오리(왼쪽). 오른쪽은 잎새보다 먼저 꽃을 피워내는 봄의 전령 노루귀.ⓒ오희삼
트럼펫처럼 맑고 우렁찬 햇살이 나목의 덤불숲을 헤집고
얼어붙은 대지에 닿으면
파릇한 새싹들이 여기저시서 부스스 얼굴을 드러냅니다.
햇살보다 향기로운 빛깔로 샛노란 복수초가 선봉에 서면,
노루귀도 이에 뒤질세라
잎새마져 제쳐두고 순백의 자태를 드러내지요.
연보라빛 현호색도 조릿대의 풀숲을 헤집고 얼굴을 내밀고
홍자색 산자고는 그래도 부끄러워 차마 꽃잎을 펼쳐내지 못하고
수줍은 새악시처럼 다소곳이 피어납니다.

▲ 언 땅을 녹이며 숲속에서 움을 트는 박새.ⓒ오희삼
바이올린의 현란한 광휘(光輝)처럼
괭이눈이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는 계곡가에는
연둣빛 박새의 새순이 돋아나고
이에 맞추어 숲속의 박새며 어치, 딱따구리가
날개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숲속을 헤집고 다니며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지휘자의 현란한 몸짓이 아니어도
숲속에서는 그렇게 봄이 오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 계곡의 양지바른 곳에서
아직 녹지 않은 계곡 한 구석의 잔설을 녹이고
기나긴 겨울나기를 끝내고 고단한 몸 이끌고 산으로 귀환한
산노루의 허허로운 눈망울 속에도 봄 냄새가 스미어 있습니다.

▲ 깊은 계곡의 이슬을 머금고 봄을 알리는 듯 고운 자태를 드러낸 애기괭이눈. 꽃잎이 마치 고양이의 앙증맞은 눈매를 닮아서 괭이눈이라 불립니다.ⓒ오희삼
▲ 조릿대의 억센 줄기를 비집고 연보랏빛 자태를 드러낸 현호색(왼쪽). 오른쪽은 애기괭이눈.ⓒ오희삼
봄은 이렇게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저마다의 모습이 한데 어울려 벌여 놓은
신명나는 굿판 같습니다.
서로 다른 음색과 서로 다른 빛깔들이 한데 어울려
또 하나의 아름다운 화음을 엮어내는 봄의 교향곡,
바로 그것이지요.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항상 오듯이
우리가 바라지 않아도 들꽃들은 때가 되면 으레 꽃을 피워냅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일 것입니다.
꽃들의 축제에 우리는 그저 손님일 뿐입니다.
없어도 그만 일 테고, 옵서버로 참석한다면 그저 떡고물 한점
얻어먹을 뿐이지요.

▲ 언 눈을 녹이며 흘러나온 물들은 숲속을 흐르며 봄이 왔음을 알리는 교향악을 연주합니다.ⓒ오희삼
▲ 한라산 깊은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에 풀잎소리, 새소리가 어우러지며 봄의 교향악은 거대한 물줄기처럼 봄을 관통하며 흐릅니다.ⓒ오희삼

봄이 되면 내딛는 발걸음마다 두려움을 가진 식물학자가 있었습니다.
무심코 내디딘 발길에 돋아나는 새순이 밟힐까 저이 걱정스러웠던 사람입니다.
기나긴 겨울, 인고의 세월을 딛고 피워낸 파릇한 새순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짓밟고 지나칠 수 있다는 미안함 때문이지요.
모름지기 봄숲에 들 때는 그래야 할 것입니다.
저들도 우리와 같이 생명이 있다는 마음. 그것이지요.
우리의 눈높이를 자연에 맞추는 일. 그것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의 병(病)이랄 수 있지요. 그것도 전염성이 강한.
그래도 이 봄엔 이 아름다운 전염병에 한번 지독히 감염되고 싶습니다.

▲ 험난하고 기나긴 겨울나기를 이겨내고 한라산으로 귀환한 노루의 허허로운 눈빛에도 봄기운이 서려 있습니다.ⓒ오희삼
▲ 따스한 햇살이 나목의 숲속에 닿으면 물오른 나무가지 끝에도 이제 막 잎을 틔우는 봄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오희삼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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