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 칼럼] 순례자의 오체투지, 업생과 원생


사람이 사는 방법은 천차만별이지만 왜 사는 냐고 질문하면 대부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행복의 추구가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목표이긴 하지만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가 산사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독경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함을 느끼는 행복도 있지만 “주님의 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사람의 행복도 있다. 또한 돈이나 권력을 통하여 중추신경의 자극을 통한 쾌락적 행복도 있다. 제주도에 살면 공기 좋고 물이 좋으니 행복하다는 판단이나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는 행복해."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자기 느낌적 행복도 있다.

이와 같이 행복의 종류를 분류하면  ‘종교적 행복’, '느낌의 행복', '쾌락적 행복‘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쾌락적 행복은 설명을 요하지 않으나 느낌의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며, 종교적 행복은 내세를 생각하며 보람 있는 선행의  삶에서 느끼는 행복이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 처럼 남태평양의 휴양지에서 여유작작한 시간을 보내는 범죄자의 삶보다 식인종에게 끌려가는 선교자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다.

필자는 지난해 9月 6일 한국방송(KBS1)에서 방영한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순례의 길을 보면서 그들의 순진한 삶을 통하여 또다른 행복을 보았다. 차마고도의 순례의 길이란 중국 사천성에서  티벳트의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 까지 1500km, 험한 준령을  이마와 팔꿈치, 무릎을 땅에 닿게 하는 오체투지의 대장정을 말한다. 팔꿈치와 무릅이 피투성이 되어도 때로는 병들어 육신이 독수리 밥이 되어도 그것을 善業이라고 한다. 윤회의 업을 털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오직 조캉사원에 도착하여 불상 앞에서 10만 배를 올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간절한 소망이고 최고의 행복이다.

업보 윤회설을 믿고 내세에는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을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내세를 생각하지 않으므로서 유교의  행복관이나 톨스토이의 행복도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을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의 의문>이라는 단편 소설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아니한 시간이다. 지금 내가 소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현재뿐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내가 현재 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에게 선(善)을 행하는 일이다.」그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필자는 차마고도의 순례의 길을 보면서  과연 종교의 힘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현실의 삶보다 내세의 삶이 중요할까? 내세의 세상은 정말 있을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 증명할 수 없는 세계이건만 현실보다 내세를 위한 처절한 고통은 또 다른 인생의 삶을 보는 듯 했다.  

▲ 김호성 전 제주도 행정부지사
우리들의 삶도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게  업생과 원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업생이란 업에 따라 사는 인생이며, 원생은 서원을 세워 살아가는 것을 말 한다.  인간이 고작 백년을 넘기가 어렵지만 억겁의 세월 속에 육도윤회의 길을 이어간다거나 부활을  믿는다면 업생이나 원생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거짓과 권세나 부를 누리며 사는 업생은 내세에는 쥐나 뱀으로 어김없이 환생할 터인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사방 80리 바위가 치마폭으로 스처서 바위가 소멸되는 세월이 1겁 이라 하는 데  억겁의 세월을 느긋하게 기다리며 고행하는 순례자들은 내세에는 행복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자체가 행복이다. /김호성 전 제주도 행정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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