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9) 화북동-강평국·최정숙 묘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강평국 추모비 ⓒ제주의소리
광복절이 다가오면 나는 요절한 강평국(1900~1933)을 떠올리게 된다. “조국이 평화를 찾는 그날까지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이름까지도 평국(平國)이라 바꾸었던 여성, 일제에 검거되어 옥살이 후 고문후유증으로 숨진 그녀는 제주의 유관순이었다. 그녀는 지금 황사평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또한 이곳에는 강평국과 절친한 친구였던 최정숙(1902~1977)의 묘도 있다.

강평국과 최정숙은 제주여성사에서 근현대를 열어젖힌 선각자들이다. 그러나 학창시절을 단짝 친구로 보냈던 이 두 여성의 생애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강평국은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33살에 그 생애를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최정숙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 지위가 정점에 이르렀고 영예를 누리다가 77세에 영면하였다.

두 사람은 태어남에서부터 죽음까지 너무나 다른 생의 궤적을 보여준다. 강평국은 이재수란 때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후 신성여학원에 입학, 탁월한 두각을 드러내어 서울의 경기고녀로 진학한다. 서울에서 삼일운동을 겪으면서,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제주에 돌아와 교사생활을 하며, 여성계몽 운동을 펼치다 동경여자의학대학으로 진학, 제주도 최초의 외국유학 여성이 되었다.

열혈투사였던 강평국은 의사가 되는 공부를 하는 한편 전국적인 독립운동 조직인 조선여자청년동맹 초대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항일투쟁을 선봉에서 이끌었다. 1933년 체포되어 일년 동안 옥살이 후 출소하였으나 이미 병든 몸은 고문으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후였다.

▲ 최정숙묘 ⓒ제주의소리
최정숙은 신성여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의 진명여고에 입학, 민족의식을 가지고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해방 후, 의사 개업을 하였으며 1949년, 신성여학교를 설립하는 데 적극 참여하여 초대교장이 되었다. 1964년에는 제주도 초대 교육감이 되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성취한 최고의 직위였다. 이는 여성 공직자 진출이 극히 미미했던 당시로서는 대단한 쾌거였다. 또한 가톨릭신자로서는 최대 영광인 로마교황 훈장을 1954년 수여받았고, 1967년에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영예라고 일컬어지던 5·16민족상 본상을 수상했다. 평생 독신이었으며 생전에는 제주여성의 상징적인 존재로 군림, 어떤 자리에서도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

우리는 비극에 끌린다. 그 뜨거운 미완의 삶에 가슴이 서러워진다. 조국과 민족의 제단에 푸르디푸른 목숨을 통째로 내던진 강평국의 통한은 우리를 무릎 꿇게 한다. 강렬했기에 짧았고, 순결했기에 더 한층 오래 기억되는 영혼.

우리는 행복에 끌린다. 오래 살아 모든 영광과 복력을 누리길 소망한다. 최정숙이 걸었던 길에는 그녀의 꿈이 거두었던 열매들, 그리고 수많은 영예의 헌사들이 즐비하다. 황사평 천주교공동묘지의 정적 속에서 만나는 이 두 여성 선각자의 비극과 영광의 드라마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한다. / 문화재청 문화재담당관 김순이

*찾아가는 길 : 황사평마을회관 옆길→한라산 쪽 천주교제주교구 황사평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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