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칼럼] 흥분에 앞서 전문가들의 논리적 반박 필요

최근 독도 문제에 이어 역사교과서까지 왜곡시킨 일본에 대해 전국민적 공분이 일고 있는 가운데, 역사왜곡이 ‘제주도=왜구거점론’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주도민 사회는 물론 전국이 술렁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엄밀히 따져보면 사실 별로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제주의소리가 보도한대로 4년 전인 2001년도에 이미 제기됐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도 일본교과서에 이러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하여 문제됐던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야무야 넘어갔다가, 독도문제에서 비롯된 한일관계의 갈등 상황과 맞물리며 최근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감정적 반발을 하기에 앞서 도대체 일본역사교과서는 어떠한 논거를 왜곡의 근거로 삼고 있는 지 알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에 대한 차분한 논리적 대응이 필요하다.

#제주와 왜구의 악연

‘왜(倭)’라는 말은 고려인과 중국인들이 일본을 멸시하여 불렀던 호칭이고, ‘왜구(倭寇)’란 일반적으로 ‘일본인 해적’을 의미한다.

왜구는 우리민족에게 어떠한 존재였던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때, “명(明)을 공격하면 남방의 왜구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진다”는 명분을 대며 쿠테타를 일으킨 것처럼, 왜구의 침입은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약탈과 납치행위는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특히 제주는 그 지리적 위치상 왜구의 침탈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다.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이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제주는 고려 말 조선 초에 걸쳐, 9진성(鎭城) 25봉수(烽燧) 38연대(煙臺), 환해장성(環海長城) 등의 방어유적을 축조한다.

이러한 시설을 만들기 위해 도민들은 힘든 노역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를 지키기 위한 군역(軍役 : 심지어 여자들까지 징발)에 시달렸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제주가 ‘왜구의 거점이고 심지어는 ‘제주인이 왜구’였다는 주장까지 오랜 전부터 일본 학계에는 제기돼 왔다.

이 주장대로라면 우리 제주도민들은 졸지에 ‘왜구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제주도 전역에 산재되어 있는 방어유적을 답사하면서, 왜구의 침탈로 극심한 피해를 당해 온 조상들의 과거를 생각하며 울분을 참지 못하던 우리로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인)=왜구(거점)론’의 대표적 논자 2인의 주장

방송대 이영 교수에 따르면, 현재 ‘제주도인=왜구론’, ‘제주도=왜구거점론’ 전파의 일본 내 학계의 대표적인 논자는, ‘다나까 다께오(田中健夫)’와 ‘다카하시 고메이(高橋公明)’ 2인이다.

다카하시는 15세기 초 기록에 “정의현의 동쪽, 牛峰(현재의 우도), 대정현의 서쪽, 竹島(차귀도)에 옛날부터 왜선이 은박(隱泊)함”이라는 기사를 인용해, 제주도가 왜선의 근거지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제주도를 침탈하기 위해 왜선이 은밀히 정박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다. ‘별방진성’과 ‘차귀진성’이 각각 '우봉'과 ‘죽도’에 출몰하는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더욱 그렇다.

또한 이들은 15세기 후반경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왜인의 언어, 의복을 입고, 해도(海島)를 왕래하며 몰래 약탈을 행하는 수적(水賊)”이라는 일부 기사에 주목해 “제주도인=왜구(와의 연합)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카하시도 밝힌 바와 같이 “왜구에 의한 해적행위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서, 조선인 해적”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에는 제주도민만이 아니라 전라도인이 많이 관련되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가 제주도의 정체성과 제주도민의 자존심이 걸린 중대한 사항이기에, 제주도민들이 강력히 대응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라 차분하고도 논리적인 반박과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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