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스님의 편지] 차 식습니다

봄이라 믿었던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누가 준 아픔도 아니건만
파릇한 냉이를 캐서 끓인 된장국 진한 향에 마음을 빼앗겼던 터라
자연의 일을 쉬 인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매화 그림자 ⓒ제주의소리 / 사진=오성스님

누군가에게 받은 맘보다
누군가에게 준 맘이 더 큰가 봅니다.
봄이 와서 설레고
눈이 와서 시린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란 것이 참 요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다 제가 있는 처소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듣는
세상 이야기는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차 한 잔 하려고요”
“예, 차 드세요”
잠시 후, 또 아까의 얘기를 꺼내려 합니다.
“그 일하고 무슨 관계가 있으세요?”
“아뇨, 세상이 어찌 되가나 싶어서요”
“놔두세요, 차 식습니다”

눈 덮인 매화와 장독대 ⓒ제주의소리 / 사진=오성스님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정작 ‘나의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지금의 내 일을 방해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건네면, 연기의 법칙을 꺼내 듭니다.
다 얽혀져 있으니 세상의 문제가 나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세상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삶의 실타래를 더욱 엉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차를 마실 때는 차를 마셔야 차 마시는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 오성 스님 ⓒ제주의소리
하나가 풀려야 둘 셋 넷이 풀려갑니다.
내 안에서 생각이 어떻게 생겨났다 어떻게 사라지나 지켜보면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그리고 있음을 알 게 될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을 뿐입니다.
바람은 바람의 일을 하고
눈은 눈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면
세상의 일도 절로 굴러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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